“고향의 꿈을 품고 사는 옥천인”
“고향의 꿈을 품고 사는 옥천인”
[내고향 옥천] 옥천읍 금구리 출신 서울디지털대학교 일본학부 교수 정오영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6.02.03 00:00
  • 호수 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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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운명은 우연처럼 시작된다. 아니 오랫동안 웅크렸던 꿈의 날개가 임계점에 다다르면서 활짝 펴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한남대 지역개발학과를 졸업할 무렵, 그는 청주 시내에서 군대 동기를 만난다.

평범해 보였던 친구의 눈에 꿈이 가득 차 있었다. 친구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 진학해서 꾸준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묘한 질시와 자극을 느낀 그는 ‘남자가 맘을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면서 유유히 사라진 친구를 잊지 못한다. 거기서부터가 본격적인 변화의 시작이었다.

   
▲ 정오영 서울디지털대학교 일본학부 교수
대학 졸업을 하고, 대기업 (주)벽산그룹에서 회계를 담당했던 그는 그야말로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기업에서 돈을 벌기보다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관심을 가졌고,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 첫 번째가 ‘교육’이라고 결론 내렸다. 

우연히 만난 군대 친구에게서 꿈을 꾸는 아름다움에 대해 느꼈다면, 이제 스스로 어떤 꿈을 꿔야 아름다운지에 대한 생각이 또렷이 선 것이다. 

훌륭한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자, 교수가 되고 싶었던 꿈을 향한 멀고 먼 행로가 시작됐다. 1985년 29살 무렵, 벽산그룹에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그는 기약할 수 없는 와세다대학 경제학부 유학길에 올랐다. 

정오영(50)씨. 옥천읍 금구리 출신으로 삼양초와 옥천중(22회), 청주고(49회)를 졸업했다. 한덕사우나 정만영씨가 바로 친형으로 5남5녀 10남매 중 여동생을 제외한 막내이다.  설을 맞아 고향에 찾아온 그를 지난 달 31일 신문사에서 만날 수 있었다. 5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어 보이는 비결에 대해 물으니 그는 ‘꿈을 꾸고 있다’고 답했다.

현대의 대북 사업의 밑그림 완성
그는 아직도 진행 중인 꿈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이 더 초롱초롱해졌다. 
“와세다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따고, 역사가 120년이 넘는 일본 주오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딴 해가 39살입니다. 일본 유학길에 나서 꼬박 10년이 걸렸죠. 일본에서는 미국, 유럽, 우리나라와 같이 박사학위를 주는데 매우 인색해서 주오대학에서도 대학 창립 이래 경제학박사 학위 소유자가 20여 명 밖에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영광이었습니다. 이제 이론은 어느 정도 배웠다고 생각했지요.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려면 실물경제를 익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일본에서 학위를 따고 나오던 95년부터 2001년까지 그는 현대경제연구원에서 연구위원으로 지내며 현대의 대북사업에 이론적인 기초를 닦아놓았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경제협력 등 굵직굵직한 대북사업의 밑그림이 그의 손 안에서 그려졌다. 그는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남북경제협력팀장을 맡으면서 대북사업에 대한 활로를 뚫어놓았다. 

그리고 2005년, 10년 동안 일본에서 이론 공부를 했고, 10년 동안 현대와 전경련에서 실물경제를 직접 다뤄보며 현장경험을 쌓은 그는 조용히 자신의 꿈을 선택했다. 바로 서울디지털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게 된 것이다.   대외협력처장과 아울러 일본학부 경제학과 교수를 맡았다. 그는 다른 명문대학보다 서울디지털대 교수가 된 것이 참 기쁘다고 했다. 

“주경야독하면서 진짜로 공부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 오는 대학 아닙니까? 그들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는 등대가 되고 싶었습니다. 또, 기업, 산업체에 다니는 사람들이 오는 대학으로 실물경제와 이론경제가 조화롭게 되는 과정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 싶었습니다.” 

그는 옥천이 자꾸 쇠락해지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했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기업도시’가 되어야 살 수 있다는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환경의 중요성을 깊게 자각하면서 환경 친화적인 기업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전제했다.

옥천에 IT인프라 구축이 살길
“옥천은 지금 어중간한 소비도시로 전락해 있습니다. 옥천이 다시 일어서려면 많은 기업들이 들어와 생산을 해내야 합니다. 거기서 직간접으로 많은 주민소득을 창출할 수 있을 겁니다. 옥천은 전국에서도 가장 교통이 좋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사통팔달 옥천’ 아닙니까? 이를 잘 활용해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구축한다면 얼마든지 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옥천이 한 발짝 더 앞서가려면 IT인프라를 튼튼히 구축해서 서비스 정보화 사회로 앞당기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국경 없는 전쟁을 치루고 있는 세계화의 경제 싸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고향에 대한 애정만큼 추억과 오랜 친구들에 대한 생각도 깊었다. 

“6학년 때 담임이셨던 이문수 선생님을 기억합니다. 선생님 아들인 상인이와는 학교를 같이 다녔거든요. 돌아가신 5학년 때 담임 김내환 선생님도 기억하고요. 친구들도 많이 만납니다. 이재수, 김장우, 전명하, 조항진 등 옥천에 있는 친구들과 서울에서 중학교 동창 모임을 같이 하는 김중식, 오성식, 윤선중 등 10명 정도가 계속 만남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있게 해준 것은 ‘고향의 힘’이라며, 앞으로 고향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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