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이룬 꿈 그림으로 세상 보듬어 안으며...
못이룬 꿈 그림으로 세상 보듬어 안으며...
함께사는 세상 [139] 지용문학관에서 아이들에게 그림 가르치는 장광용씨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6.01.27 00:00
  • 호수 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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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과 목요일이면 정지용 시인과 관련한 기억들을 모아 놓은 지용문학관에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모인다. 크레파스를 들고 자신의 머릿속에만 있던 생각을 작은 종이 위에 옮겨 놓는다. 크레파스로 예쁜 색까지 입히면 거칠지만 그럴듯한 미술작품 하나가 완성된다. 그곳에서 꼬마들을 가르치는 사람은 장광용(45)씨다. 지용문학관에서 근무하는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미술교사의 꿈은 접었지만
지금 옥천군에서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그의 전공은 ‘미술’이었다. 어려서부터 무엇인가를 그리는 것이 더 없이 행복했다. 그리고 그 재능은 흙바닥과 책의 작은 귀퉁이에 펼쳐놓기엔 너무 큰 꿈이 되어버렸다. 고향 부여군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버린 꿈을 이루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수원에 있는 선배를 찾아가 화실 청소를 하는 조건으로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낯선 땅에서 힘겨웠지만 하고 싶은 것을 맘껏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 노력으로 대학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진학할 수 있었다.

▲ 현재 군에서 청원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장광용씨의 전공은 미술. 그는 매주 화.목요일 지용문학관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그림을 가르치고 있다.
목원대학교 미술교육과. 합격은 했지만 입학금 마련이 쉽지 않았던 가정형편에 편안한 학교생활은 처음부터 약속되지 않았다. 맘 편히 강의실에서, 아니면 실습실에서 그림만 그리고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르바이트도 하고, 휴학을 한 채 고향에 화실을 차려 후배들도 가르쳐 보았지만 상황을 반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꿈을 이루기 위해 힘들게 들어간 대학교는 3학년까지 다니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한창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진행하다가 막바지에 접은 것이다. 아쉬움이 컸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대학을 다니기 위해 누님 집에 살게 된 것이 인연이 돼 군 공무원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그것이 그림과의 끈을 딱 잘라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선생님∼’부를 때 큰 행복
지금은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통해 그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공간에 근무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뒤에서 꼬마가 ‘선생님∼’하고 부르는 그 순간은 정말…” 

얼핏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의 장광용씨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끼는 행복을 얘기하는 순간만큼은 얼굴에 아이같이 환한 미소가 가득 담긴다. 가슴 벅찬 행복은 매주 두 번씩 지용문학관을 찾아와 장씨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이 준 강의료인 셈이다. 

“제가 어렸을 때 너무 힘들게 공부를 해서인지 동네 아이들에게 좀 더 열심히 가르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요. 오고 싶은 마음이 드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와서 그림을 그리고 가도록 하죠. 그림은 억지로 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아이 때는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자신의 꿈을 막 펼쳐야 하는 시기라는 게 장씨의 생각이다. 그래서 지용문학관에서 그림을 배우겠다는 아이들에게 반드시 출석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빈 강의실에 들어가 아이들이 앉는 책상 서랍에서 그림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면서 장씨는 그 그림을 그린 아이의 마음을 읽어 준다. 

같은 그림을 보며 그렸지만 아이의 개성이 드러나 제각각인 그림의 신비로움을 설명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그림 그리기는 ‘틀 깨기’라고 정의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사각의 틀에 갇혀가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그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영역을 맘껏 확장하는데 의미가 있다는 얘기다. 

“미술을 하는 사람들 중에 마음이 악한 사람은 없어요.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렇겠지만요. 자연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림을 그릴 수가 없거든요. 또 활기도 넘치구요.” 

좋은 풍경을 보면 감동하고 후미진 뒷골목이나 다 쓰러져가는 흉가에서도 예술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예술가의 눈은 그래서 만들어질 수 있다고 장씨는 설명한다.

미술은 마약같이 중독성 강해
지용문학관 안내석 뒤편 한구석에 이젤이 보였다. 그리고 이젤 위엔 조금씩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풍경화가 놓여 있다. 그림을 그리기엔 너무 작아 보이지만 장씨에겐 소중한 공간이다. 

“월요일이 휴관일이잖아요. 가끔 나와서 그림을 그려요. 작업실이 마땅히 없어서….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하죠.” 

생활에 바쁘고 여러 환경적 여건이 허락지 않아 본격적으로 많은 그림을 그려내지 못하지만 손에서 붓을 놓지는 않는다. 

“그림은 마약 같아요. 어려서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 그림을 그렸으면서 지금도 포기를 못하잖아요. 내가 그릴 수 없는 처지면 전시회를 찾아가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보고서라도 희열을 느껴야 하거든요.” 

계속되는 그의 작업이 ‘지용’으로 까지 확대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피어오른다. ‘지용이 읊은 아름다운 고향의 이미지가 그의 손으로 캔버스에 표현돼 지용문학관에 걸리는 것도 의미 있겠다’ 싶었다. 

장씨는 옥천이 문화적으로 좀 더 풍요로운 고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내비친다. 가능성도 충분한 고장이기에 더욱 그렇다. 최근 미술작가들 몇몇이 옥천에 둥지를 튼 것을 예로 들며 희망을 얘기한다. 

“옥천은 풍경이 아름답잖아요. 예술가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고장이거든요. 좀 더 젊은 작가들이 옥천에서 많이 활동하면서 주민들과 호흡하고 함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바람의 작은 실천일까? 장광용씨는 옥천미술협회 창립에 깊숙이 관여하고 지금은 이사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용문학관 근무 행복
사람에겐 누구나 전성기가 있다고 하는데 장광용씨에겐 지금이 그렇지 않은가 싶을 정도로 행복해보였다. 비단, 그림을 그리고 가르치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기회를 함께 제공한 지용문학관에서 일하는 것이 행복이다. 개관하면서 시작된 지용문학관에서의 근무는 일로 사람을 대하지 않을 수 있어 좋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거든요.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과 성심성의껏 안내하고 그 분들이 만족해하면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껴요. 요즘엔 그런 보람을 느낄 기회가 많아서 좋구요.”

하루 평균 70명이 방문하고 이미 방문객 수 1만 명을 돌파한 것도 그래서 그에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장광용씨는 아내 김성자(42)씨와 문수(14), 효정(11) 남매를 두고 옥천읍 금구리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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