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왔던 서울애기 선생님 돼 대전 살아요''
“전학왔던 서울애기 선생님 돼 대전 살아요''
[내고향 옥천]연주리 중간말 출신 김현숙 충남 연기군 연동초등학교 교사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6.01.20 00:00
  • 호수 8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안남 연주리 중간말 출신 김현숙씨

어느 날, 서울에서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안남초등학교로 전학 왔다. 모두 보자기에 책을 싸가지고 다닐 때 그 여학생은 책가방을 메고 다녔다. 긴 머리에 예쁜 머리핀을 꽂은 그 아이는 쉬는 시간마다 반 아이들에게 둘러싸이곤 했다. 그 아이가 가지고 온 필통, 연필이 모두 신기했다. 아버지가 고향인 연주리 중간말에 예쁜 양옥집을 지은 덕에 ‘새집 애’라고 불렸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에서 살고 있다.

군인과 결혼한 덕에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생활을 하다가 이제 고향과 지척인 대전 자운대에 자리잡았다. 고향인 옥천과 학교 친구들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김현숙(46)씨의 눈엔 그리움이 가득하다.

◆마을회관서 아이들 가르치던 기억
‘새집 애’가 아버지의 고향인 안남면으로 전학을 온 것은 1974년 일이다. 서울에서 돈을 벌어 고향에 가고 싶어 했던 아버지 김형균(작고)씨를 따라서였다.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아서 안남초등학교는 일주일밖에 안다녔어요. 초등학교 친구들은 가물가물한데 안내중학교 친구들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그때는 집에서 중학교까지 걸어 다니는 것도 무척 힘들었어요. 익숙하지 않아서. 학교 가면 졸았던 기억밖에 안나요.”

안내중학교를 졸업하고 충남여고를 다니다 대학에 들어갈 즈음, 아버지가 고향에서 새롭게 시작했던 운수사업이 실패하고 어머니마저 쓰러지면서 상황은 많이 변했다. 일찍 시집을 간 언니를 대신해 집안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김씨의 앞날이 그리 순탄치 않았다.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오랜 꿈이었던 교육자의 길까지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방송통신대(당시 서울대학교 부설) 초등교육과에 입학했다. 2년 동안 밤에는 공부하고 낮에는 일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코피를 쏟을 정도로 힘든 하루하루였지만 그 와중에 동네 아이들을 마을회관에 모아 놓고 가르쳤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단순한 욕구를 넘어선 적성이었는가 보다.

“그때 안남교회에 심상호(작고) 목사님이 계셨거든요. 다른 봉사활동도 많이 하셨던 목사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의 마을회관이었지만 그래도 재밌었어요. 청정리에 있는 농암저수지 둑으로 소풍도 가곤 했는걸요.”

◆스물아홉을 꽉 채워 머무른 옥천
마을회관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안남초 병설유치원에 보조교사로 일을 하면서 2년이라는 시간은 금방 흘렀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초등학교 교사자격증을 받았을 때 마침 정부에서 바쁜 영농철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농촌탁아소 사업’을 시작했다. 안남면은 김씨가 그 일을 맡게 된다.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김씨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상자와 빈병 등을 주워 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있는 간단한 장난감을 만들고 시집간 언니에게 부탁해 헌책도 모았다. 모든 것이 부족한 여건이었지만 김현숙씨의 정성만큼은 차고 넘쳐흘렀다.

“그때 농촌탁아소 사업이 끝나고 어머니들이 찾아오셔서 `따로 급여를 만들어 줄테니 아이들을 계속 가르쳐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어요. 그게 보람이었죠.”

그런 마을 분위기와 김씨의 정성 때문이었는지 다행히도 안남면 청정리에 새마을 유아원이 설립됐다.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던 1천만원의 예산이 투입돼 훌륭한 시설을 갖췄다.

“지금은 삼화초등학교도 없어지고 새마을 유아원도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니 아쉽더라구요. 정성을 쏟았던 고향인데 제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힘들지만 보람도 컸던 나날이었다. 새마을 유아원과  안남초등학교·삼양초등학교 병설유치원에서 병아리들을 가르쳤다. 태어나서 열네 살이 될 때까지 서울에서 살았던 것이 아쉬웠는지 김현숙씨는 꽉 채운 스물아홉이 될 때까지 옥천에 살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때는 시집도 못 갈 줄 알았어요. 노처녀였잖아요. 명절이라도 되어서 외지에 나가 살던 친구들이 오면 일부러 피하고 그랬는데…. 그냥 맘이 좀 그랬었나봐요.”

그리고 남편인 김윤혁(방위산업창 근무)소령을 만나면서 오랜 시간 남다른 애정으로 생활했던 옥천을 떠나게 된다.

◆학교서 아이들 가르치며 꿈 이뤄
결혼을 해 속초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후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슬하의 남매를 어느 정도 키우고는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 또 한 번의 도전을 했다. 밤잠을 줄이면서 노력한 결과 지난 1999년 초등임용고시에 합격했다. 지금은 연기군 연동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정말 행복하죠. 결혼하고 모든 게 다 잘 된 것 같아요. 이렇게 하고 싶은 일도 하고요. 요즘엔 그림도 그려요. 저도 몰랐는데 재밌더라구요.”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나 텔레비전 옆에 있는 조소상이 예사롭지 않다. 한참을 얘기하고도 고향에 대한 애틋함이 가시지 않는지 방에 들어가 오래된 사진첩을 가지고 나온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가리키는 사진 속에는 20년은 훌쩍 넘은 안남면의 모습이 담겨 있고 지금은 청년이 되었을 아이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