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개혁의 성지 `옥천' 자랑스럽습니다”
“언론개혁의 성지 `옥천' 자랑스럽습니다”
[내고향 옥천] 옥천읍 금구리 출신 대전시청 시정 홍보지 월간 이츠대전 편집위원 허용주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6.01.13 00:00
  • 호수 8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츠대전 편집위원 허용주씨

“여기서 옥천하면 뭘 가장 떠올리는 줄 아세요? 제가 아는 선배 기자가 그러던데요. 옥천이 몇 년 후면 `언론개혁의 성지'로 특화돼서 막 뜨게 될거라구 말이에요. 제가 일했던 곳이 언론계 이쪽이라 고향이 옥천이라고 하면 만날때 마다 `안티조선의 본고장', `언론개혁의 성지'란 말을 해요. 사실 제 고향 옥천이 남들 입에 대단한 것처럼 오르내리는데 뿌듯하죠.”

그녀를 만났을 때, `옥천'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향수의 고장' 옥천이 아니었다.  여느 고향 사람이 다 그러듯 으례 그런 대답을 하겠거니, 정지용 시인과 `향수'란 시를 떠올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나온 대답은 이처럼 새로웠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는 이제 옥천의 기본 바탕이 되어 당연한 것으로 각인됐고, `언론개혁의 성지'란 영예로운 별명이 새롭게 덧씌워지는 순간이었다.  허용주(33)씨. 그녀는 `옥천' 출신이라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그것은 언론계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자부심이었다.

`언론개혁의 성지'라 불리는 옥천이 고향인 `언론인'인데, 정말 바르고 정직한 언론인이 안된다면 고향에 누가 될 것 같은 책무감 같은 것도 들었을 게다.  옥천읍 금구리가 고향. 옥천장례식장을 운영하는 허영세씨의 막내딸이다. 지금은 대전 시정 홍보지 `이츠 대전(It's Daejeon)'의 편집위원이다. 삼양초와 옥천여중, 옥천고를 나오고, 충남대 정치외교과(93학번)를 졸업한 후, 바로 신문기자로 진로를 잡았다.

97년에 창간된 충북일보 공채 1기로 들어갔지만, IMF의 여파로 직격탄을 맞아 회사가 휘청거리는 바람에 1년 반만에 퇴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1999년에 두번 째 직장인 중도일보에 들어갔지만, 이 역시 2003년 3월에 휴간하면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소외된 사람을 위한 언론이기를
그녀는 바로 열악한 지방신문의 현실을 체감한 산 증인이었다. 하지만, 그 열악함 속에서도 언론의 사명과 지켜야 할 것은 잃어버리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했다.  `시대정신'과 `비판의식', 그리고 `서민들의 눈높이'를 잊지 않았다. 

중도일보를 끝으로 지방신문 근무를 마감한 그녀는 2003년 9월부터 2004년 1월까지 4개월 남짓 서울의 여성 주간지인 우먼타임스에 경력기자로 채용돼 정치부를 잠깐 맡기도 하는 등, 짧은 기간 동안 다양한 언론 경력을 쌓기도 했다. 

“요즘 언론들에 대해 솔직히 불만이 많아요. 열심히 서민들속으로 뛰어다니면서 쓸 기사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냥 책상머리에서 펜대 굴리며, 기사를 위한 기사를 쓰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나를 위한 기사, 신문을 위한 기사가 아니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언론이 존재하는 거잖아요.”

그녀는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신문을 꼼꼼히 살펴보며, 나름대로 분석한 비평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젊은 언론인으로 나름대로의 꼿꼿함을 간직했던 그녀는 2005년2월 새로운 전기를 맡는다. 그동안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왔던 언론계에서 대전 시정을 홍보하는 홍보잡지 `이츠대전'의 편집위원으로 공채된 것이다. 

서슬 퍼런 비판의 칼날을 잠시 접긴 했지만, 그렇다고 글 쓰는 이의 자존심까지 버린 건 아니었다. 주민들 속으로 깊숙히 파고들었고, 그들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전하느라 지역 곳곳을 뛰어다녔다. 

“지방신문에 일할 때와 달리 좋은 반응이 많이 쏟아져 너무 즐거워요. 솔직히 당시 일할 때는 지방신문을 많이 구독하지 않아 읽는 사람도 별로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츠대전은 대전시 전역 3만부가 뿌려지고, 매달 오는 독자 우편엽서만 해도 700통이 넘거든요. 보람을 느껴요.”

바른 언론이 숨쉬는 고장이 되길
“저 옥천신문에도 기대가 많아요. 옥천신문하면 전국 지역신문 중에서도 알아주는 신문이잖아요. 옥천의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어떤 버팀목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서른을 갓넘은 젊은 사람에게서 고향의 기억을 길어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금구천에서 수영하던 기억, 엄마가 빨래하던 기억 이런 것 생각나죠. 초중학교 다닐 때는 제가 참 공부를 못 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조금씩 공부를 하기 시작했죠. 기자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통령부터 포장마차 아줌마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잖아요. 그만큼 시각이 넓어지고 사회를 보는 눈도 깊어지거든요. 저요. 앞으로 뭘 더 하고 싶냐구요? 언론을 비평하는 일을 하거나,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 데 직접 뛰어들고 싶다는 유혹도 가끔 받아요.”

그녀는 젊은 나이답게 패기가 넘쳤다. 인터뷰 과정에서 한겨레신문 초대 대표인 청암 송건호 선생이 옥천출신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면서, 그녀는 더욱 더 옥천을 자랑스럽게 홍보하겠다고 다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