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안남면 연주리 괴생이여울·씨구목여울
[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안남면 연주리 괴생이여울·씨구목여울
소 품앗이로 공동체 일궜던 '괴생이', 안남에서 '씨구목' 넘어 옥천장으로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5.12.02 00:00
  • 호수 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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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생이 마을 앞에 큰 절벽으로 보이는 것이 약바위다 약바위 앞에 금강어부 '연주호' 김미희씨가 그물을 걷고 있다. 금강과 어울린 연주호의 모습이 그림같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사람의 발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은 곳이라고는 해도 낚시꾼들의 발걸음만은 여전히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강물따라 내려가는 길, 금강은 별 소리없이 제 갈 길을 가는데 갈대는 가을 햇살을 받아 흔들립니다. 그러고보니 사람이 다니지 않아 자연생태가 그대로 보전되어 있음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갈마골을 내려가 괴생이 마을 바로 앞쪽에 큰 절벽. ‘약바위’라고 불린 바위 앞 잔잔한 물살 위에서 어부가 작업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잡습니다. 금강의 어부 주영현씨의 부인 김미희씨입니다. 금강 한가운데에서 고기잡는 어부의 모습, 그것은 한 편의 그림이었습니다. 금강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이웃들. 지금은 없어진 마을인 연주리 괴생이 마을 앞에 있던 괴생이여울과 씨구목여울이 오늘 가볼 여울입니다. 여울지기 정수병씨와 괴생이 마을에 살았던 조장석(안남면 연주리 독락정)씨가 여울에 동행했습니다. - 편집자

◆이 길은 금강을 따라 맨 처음 냈던 길
안남면 연주리 독락정에서 몇 차례 여울에 동행했던 조장석(70)씨를 만났다. 괴생이 마을과 독락정에서 살아온 조씨와 함께 여울을 찾아 떠났다.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독락정 앞을 지나 금강을 따라 비포장길로 들어선다.

낚시꾼들의 주요 통행로이기도 할뿐더러 동이면 청마리 갈마골 사람들의 소중한 마을 진입로이기도 하다. 비포장이긴 하나 갈마골여울까지는 차량이 통과하는데 어려움이 별로 없다. 갈마골을 지나면서 길은 움푹 패인 채 방치되고 있다. 움푹 패인 곳으로 잡으면 차량 밑바닥이 닿을 정도다.

“이 길은 옛날 길 그대로여. 옛날 일본 놈들이 맨들어 논 그대로 길이라니께. 이 길은 피실 나루터를 가기 위한 평탄한 길이라구. 후에 연주리 점촌으로 해서 비들목재를 넘는 길이 새로 생겼지만 피실을 가기 위해서는 이 길이 높이가 없는 좋은 길이었지.” [조장석씨]

대청호가 만들어지면서 이 길을 높이기라도 했더라면 괴생이 마을은 없어지지 않았을 것 아니냐는 의문이 생겼다.

“그거? 저 강 건너편에 보이지. 저게 대청호 막을 때 갈마골 사람들이 이용하라고 낸 길인데. 지금 아무 쓸모가 없지. 돈만 퍼다부은 거야. 당시 갈마골에 가구 수가 많았으니까.”

건너편에 강변으로 낸 도로 형태가 보인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이왕 배편으로 강을 건너게 하려면 괴생이 사람들까지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기존 길을 높이는 방법을 택했어야 했다.

지나간 옛 일이다. 관료적인 사고가 묻어난 또 하나의 예산낭비 현장을 금강을 따라서도 본 것이어서 씁쓸하다.

◆없어진 마을, 괴생이 
한참을 돌아가니 길이 두 갈래로 갈린다. 하나는 강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고, 하나는 괴생이 마을 입구다. 더 이상 들어가면 차를 돌릴 수 없을 것 같다. 차를 돌리기로 했다.

괴생이. 이름도 이상하다 싶지만 어떤 지도에 보니 한자 이름이로 고성(古城)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옛 성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겠다. 그럴 수 있겠다. 연주리 뒷산이 둔주봉인데, 발견한 둔주봉 꼭대기에 있는 성을 빗대어 이 마을 이름을 고성이라고 하지는 않았을까?

어쨌든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마을이 길로 올라서니 바로 눈 앞에 펼쳐진다. 밭이 나온다. 몇 년을 묵었나보다. 밭둑가에 감나무. 꼭대기에 몇 개 감이 달렸다.

“누가 와서 감을 따갔네?”

몇 개의 종이컵 등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본 조장석씨가 한 마디 한다.

“이 밭이 3년 전까지 내가 일궜던 밭이야.”

밭에는 여기저기 파헤친 흔적이 있는 걸로 보아 아마도 멧돼지가 틀림없다. 대나무가 앞을 가린다. 동시에 담으로 쳤던 돌담이 눈에 들어왔다. 집터란다.

◆집터에는 대나무만 무성하고
대나무밭 가운데 형체가 남아 있는 집은 이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이미 대나무는 이 집의 마당을 덮었고, 부엌에도 군데군데 대나무가 박혔다. 얼마 있지 않으면 대나무로 뒤덮일 판이다. 신기한 것은 집터에만 대나무가 있다는 것이다. 밭이나 논 등 농경지에는 대나무가 없다.

“최씨들이 이 곳에 피난을 와서 살았다는 거여.  저 산 보이지. 최씨들이 먼저 들어왔으니 이 주변 땅도 최씨들이 갖고 있었댜. 그런데 송시열 선생이 아마도 돌아다니다 저 산에다 산소를 썼다는 거여. 산소가 지금도 있는데 집채처럼 커. 각 마을마다 부역을 해서 흙을 지고 오라고 해서 썼다는 건데. 산소를 쓰고 나서는 우리 조상이 여기 모셔져 있으니 주변은 모두 송씨 땅이라고 하더랴. 당시 송시열 권세야 오죽했겄어. 그러니 최씨들은 분통이 터지지. 그러고 가는 걸 최씨 집안 중 한 사람이 여울까지 쫓아가 멱살을 잡고 흔들었댜. 어디 그게 당신들 땅이냐고. 그래서 산소를 쓴 자리를 빼놓고는 땅을 되찾았댜!.”

지금도 마을에서 보이는 산꼭대기에는 산소가 있단다. 그 산소가 들어선 자리는 빼앗겼다지만 아무리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시절, 송씨에 대항해 자기 땅을 지켜낸 최씨들이었다는 게 조장석씨의 말.

조씨는 괴생이 마을에 14살 때 들어와 15년 동안 살다 나갔다. 결혼까지 한 후 연주리로 나갔던 조씨다. 괴생이에는 다른 곳과는 다른 독특한 공동체 문화가 있었다.

워낙 척박하다 보니 생긴 것이겠으나 ‘소 품앗이’라는 게 있었다. 마을이 좁다 보니 벼농사를 연주리 독락정 앞에 가서 지었는데 수확철만 되면 벼를 싣고 오는 행렬이 장관이었다. 열흘 정도 일할 분량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서 하면 하루면 끝냈다. 열 집이면 열흘이면 가을일을 끝낸 것이다.

이런 일을 혼자서 하려면 두 달씩 걸려야 할 일이었다. 먹고 사는 것이 척박하다 보니 소를 활용해 일을 모아서 했다. 그래야 일의 능률도 올랐던 것이다. 대청호가 생기고 마을은 없어졌다. 진입로가 물에 차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이곳이 괴생이여울. 마을이 있던 자리에서 하류쪽에 있다. 왼쪽 정수병씨와 조장석씨가 여울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괴생이 여울과 씨구목 여울엔 잔잔한 물결만
강가로 나왔다. 큰 바위 절벽이 강 건너편에 펼쳐져 있다. 약바위다. 왜 약바위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종미리 사람들이 나무를 해갈 때는 약바위까지 와서는 소를 매놓고 걸어서 약바위를 돌아서 산 위에 올라가 나무를 해왔단다.

그 강가 길은 종미리 사람들은 물론 갈마골 사람들이 주로 걸었던 길이었다. 그 길을 걸어 괴생이 여울에 닿았고, 그 아래로 더 걸어 씨구목을 넘어 옥천장을 갔다. 괴생이 여울은 약바위에서 더 하류 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없는 대청호 물로 뒤덮인 강물. 그러나 여울에선 옛날 사금을 캤다. 종미리 염석균(84)씨는 젊은 시절 여울에서 사금을 직접 캤다는 증언을 한다. 굵은 것은 해바라기씨처럼 큰 것도 있었다.  괴생이 여울은 주로 괴생이 사람들이 건너 다녔다. 마을에서는 작은 배(오배라고 한다)를 만들어 물이 많거나 겨울 등에는 배를 타고 다녔다. 겨울에 맨 발로 여울을 건너려면 그만큼 고생이었기 때문이다.

여울을 지나치니 괴생이 마을의 작은 자연마을이 또 하나 나온다. 즘터라고 했다. 즘터에 세 가구가 살았다. 아직 남아 있는 축대의 흔적. 사람이 살았음을 알려주는 증거다. 즘터 바로 밑에 씨구목 여울이 있다. 사실 여울이라고는 해도 어지간하면 건너지 않았다. 즘터 사람들은 건넜어도. 여울 바닥이 험했기 때문이다. 강 건너 씨구목이라는 고개가 훤히 보인다.

영낙없이 바위 중간을 깨서 고개를 낸 모양이다. 이를 두고 옛 어른들은 길을 내는데 혈이 끊겨 고개에서 피가 흘러나왔다는 전설이 전한다고 정수병씨가 전한다. 어쨌든 씨구목 고개는 갈마골에서 온 사람들, 종미리 사람들, 연주리 독락정과 괴생이, 즘터 사람들이 주로 넘던 애환어린 고개다. 씨구목만 넘으면 석탄리 덩기미에 닿았다. 옥천장을 가는데 지름길이었던 만큼 씨구목의 활용도는 아주 컸다.

씨구목은 청마리를 벗어나 석탄리 땅에 속한다.  이 길로 계속 내려가면 어디일까? 피실 나루터에 다다른다. 지금은 잘 포장된 비들목재를 넘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건넜던 피실 나루터. 그나마 지금은 길이 끊겨 자연생태가 보전되고 있으니 이 구간만이라도 생태를 보전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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