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82] 군북면 자모리(1) - 셋집메
신마을탐방 [182] 군북면 자모리(1) - 셋집메
머들령에 폭탄떨어질 때 형성된 마을, 첫 이주민들 지금도 알콩달콩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5.11.25 00:00
  • 호수 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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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인지 모르지만 마을 앞 개울에 아낙네들이 모여 빨레를 하는 모습이다. 오른쪽 아주머니가 마을에 처음 집을 지었던 박봉래씨의 아내 김옥임(76, 아래사진 가운데)씨다. 왼쪽은 얼마전 세상을 떠난 박승돈(73, 아래사진 왼쪽)씨의 아내 이순재씨다. 입에 있는 것도 빼어 줄만큼 알콩달콩 살았던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주듯 환한 미소가 아름답다.

4호 국도를 따라 옥천에서 대전을 가다보면 마지막으로 만나는 마을이 군북면 증약리와 함께 자모리다. 군북면 자료에 따르면 자모리는 증약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1908년 자모리로 분구되었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자무실’이라고 불렀던 지명을 한자화 하면서 생긴 것으로 군북면은 밝히고 있다. 또 옛날 이 마을에 살았던 충신이 매일 국사봉에 올라가 북쪽을 향하여 나랏님을 사모하였음으로 자모실, 자모곡이라고 하였다가 자모리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자연마을로는 윗자모와 아랫자모로 나뉘지만 그 새중간에 마을이 하나 더 있다. 이번 호에서는 가장 적은 가구가 살고 있는 셋집메부터 소개한다.

아랫 자모리로 들어가 윗 자모리로 들어가다보면 내를 건너 오른쪽으로 산자락에 길게 늘어선 작은 마을 하나가 보인다. 그곳이 ‘셋집메’다.

사실 마을 이름을 어떻게 표기해야 하는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이곳에 세 가구가 이주를 하면서 형성된 마을이어서 ‘셋집메’라 불렀다는 것이 마을 주민들의 설명인데. 정확한 표기는 확인이 쉽지 않다.

세 가구가 살았다 하니 ‘세 집’은 이해가 가는데 ‘매’ 혹은 ‘메’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산을 예스럽게 부르는 말로 해설되는 ‘메’라는 말을 그냥 쓰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식장산 줄기가 길게 흘러내린 끝자락에 마을이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 근대에 새로 형성된 마을은 신기리나 새터마을 정도로 불리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셋집메’는 그런 지명과는 차별성을 가져 더욱 재밌다. 다행인 것은 그곳에 처음 마을을 만든 세 가구 중 두 집의 주인들을 아직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마을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 처음 이곳에 집을 지었던 박승돈(73, 맨 왼쪽)씨와 김옥임(76), 박봉래(84)씨 부부.

■피난민들이 지어 준 마을 이름
‘셋집메’는 한국 근대역사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는 한국전쟁이라는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이기도 하다. 세 집 중 골목 첫 집에 살고 있는 박승돈(73)씨에 따르면 셋집메가 생긴 연도를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던 그 해 미군들이 마을로 들어와 소개령을 내렸다. 한 손에 횃불을 들고 처마 밑에 들이대면서 인민군이 내려오니 모두 마을에서 떠나라고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집이 불에 타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자모리 주민들은 마을을 떠났다.

“저 앞 철탑보이지. 그 산을 넘으면 군서면 오동리여. 거기 무중골이라는 데가 있어. 거기서 며칠 숨어 있다가 요 앞 갯골굴텅에서 움막을 치고 살았지. 아이구, 그 고생을 어떻게 말해.”

그리고 다시 마을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불에 타 기둥만 남은 집에 가마니를 둘러쳤다. 일제강점기에 공출로 받은 가마니가 이백리 한 창고에 쌓여 있는 것을 아는 눈치 빠른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 즈음이 아랫자모와 윗자모 사이에 있던 밭에 집 세 채가 들어선 때다.

“저 머들령(마달령) 고개가 폭격을 받을 때였어. 집을 짓다가 쾅쾅 소리가 나면 무서워서 피했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나와서 집을 지었지. 허허허.”
“아니, 비행기 폭격이 있는데 집을 짓고 싶었어요?”
“안 그러면 어떻게 겨울을 나. 할 수 없지. 지금은 이 주변 산들에 나무가 빼곡하지만 그 때는 민둥산이었어. 동네에서도 팔아먹고 대전과 옥천 나뭇꾼들 등살에 남아나질 않았어. 그러니 어떻게. 저 산 너머 대전 수도산까지 가서 집 지을 나무를 베어왔어. 얼마나 고생스러웠는데. 말도 못해. 지붕에 얹을 볏짚이 없어서 산에 올라가 풀을 베어다가 지붕을 해 얹었다니까.”

그 때의 고생스러움은 웃음으로 흘려보낼 수 있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고생고생 해서 집 세 채를 짓고 나니 앞길을 오고가던 피난민들 사이에서는 ‘삼형제가 나란히 집을 짓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사는 곳’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셋집메’라는 마을이름이 생겼다. 결국 마을 이름을 작명한 사람들은 바로 전쟁통에 고향을 떠나 몸을 피했던 피난민들이다.

“요 앞길이 피난민들이 다녔던 길이여. 대전에서 저 수도산을 넘어 이 길로 다니면서 우리 마을을 셋집메라고 불렀지. 삼형제가 집을 짓고 사이좋게 산다는 말도 덧붙였지만 사실 우리는 삼형제는 아니었고 이종, 고종으로 이렇게 저렇게 얽힌 친척간이긴 했지.”

지금은 마을 가운데 이차선 새 도로가 났지만 예전에는 셋집메 앞길이 옥천과 대전을 잇는 중요한 통로였다. 그리로 해서 장고개를 넘어 대전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넘어가면 판암동 지하철 기지창 쪽이 나온다고 한다.

▲ 새로 난 길에서 바라본 셋집메 마을 전경.

■전국 최초로 반상회가 열린 마을
박승돈(73), 박봉래(84)씨 네와 지금은 이사를 가 없지만 10여년 전까지는 살았던 이종식씨 등이 처음 마을을 만든 셋집메에는 지금 십여 호로 가구 수가 늘었다. 셋집메 첫 거주자들과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때 군의원을 지낸 이찬규(73)씨가 거든다.

“이 동네가 참 부지런하기도 하고 정이 넘치는 곳이었어. 대한민국 반상회 1호가 여기여 여기. 그거 몰랐지? 매년 한 번씩 반상회에서 보문산으로 놀러도 다녔고, 공동으로 탈곡기도 구입했지. 그러고 나서 그게 전국으로 퍼진 거 아니여. 그게 아마 65년도 였지.”

한창 흥이 더할 때 김남희 증약보건진료소장이 찾아왔다. 서로 서로 농을 주고 받는 모양새가 하루이틀 쌓인 정이 아니다. 그 마저도 셋집메 마을을 만드는 하나의 자연스런 풍경이 된다.

“옛날에는 이웃 아저씨 아줌마가 손자·손녀들 데리고 매일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겨. 그러면 그게 그렇게 좋았어. 우리는 그 때가 제일 좋았어. 행복했지.”

마당에서 콩을 고르던 김옥임(76. 박봉래씨의 아내)씨는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집 앞 개울가 너른 바위에 모여 시린 손 호호 불어가며 빨래를 해도 즐거웠고, 개울에서 잡은 미꾸라지, 장어, 가재, 민물새우로 만든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저 앞에 회떡굴멍이 있었거든. 백회만드는 독이 있었는데 그 때 거기가서 회를 가져다가 개울에 풀어놓고 조금 기다리면 물고기들이 둥둥 떠올랐지. 그러면 건져서 나눠먹고 그랬어. 그 때가 재밌었지. 입안에 있는 것도 나눠 먹는 사이였는데 뭐. 지금도 터가 좋아서 이사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밭 임자들이 어디 팔아야지.”

신이나 얘기하던 박승돈씨는 내친 김에 ‘어여 그린벨트나 해제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을 최대 소망을 얘기한다.

“아, 여당이든 야당이든 그린벨트 풀어준다는 놈 찍어 줄겨. 다음 선거에는.”

웃음으로 마무리되었지만 그만큼 간곡한 소망이다. 조용히 얘기만 듣고 간혹 슬몃 슬몃 미소를 짓던 김옥임씨가 조용히 일어나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우며 손에 사진 몇 장을 들고 나온다. 셋집메에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를 알려주듯 빛바랜 사진 속에서 이웃사촌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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