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링공과 굴삭기···그에겐 소중한 행복
볼링공과 굴삭기···그에겐 소중한 행복
함께사는 세상 [136] 삶을 즐길 줄 아는 김순수씨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5.11.11 00:00
  • 호수 7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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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삭기 앞에 선 김순수씨

자그마한 체구에 항상 모자를 쓰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짓다가도 어떤 얘기를 할 때는 한없이 깊어지는 부리부리한 눈을 가졌다.

“살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게 사시는 분이에요. 좋아하는 일 열심히 하고 그러니까 주위사람들도 잘 따르죠.”

김세환(29)이 얘기하는 김순수(43·옥천읍 가화리)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만난 그는 “볼링협회 일로 만나자고 한 것 아니냐?”며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끄집어내는 것에 영 부담스러워했다. 그리곤 이번 도민체전에서 옥천군볼링협회가 거둔 성과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 한다.

볼링협회 창립 이후 최고로 좋은 성적이라는 ‘종합 3위 소식’을 전하면서, 여자 군대표 선수들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볼링에 대한, 옥천 볼링 동호인들에 대한 애정이 드러난다.

서울보다는 고향이 좋아
김순수씨의 고향은 군서면 동산리다. 군서초등학교 앞 구멍가게 막내아들. 초등학교만 고향에서 다니고 중·고등학교는 형들이 자리 잡고 있던 서울에서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군 생활을 하던 중 고향 정착계획을 세웠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형들도 있는데 그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에 고향에서의 인생을 꿈꾸었다는 것이 조금은 신기했다.

“그냥 여기가 좋잖아요. 여기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무얼 할까 고민하다가 중장비 학원을 다녔어요. 뚜렷한 기술이 있어야겠더라구요.”

철이 일찍 든 것은 분명한 듯 하다. 그때부터 시작한 굴삭기 운전이 이제 25년이 되었고 올 초에 창립한 옥천군굴삭기연합회 회장직도 맡았다. 경력으로 치자면 옥천군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지 싶다.

“지금이야 중장비 기술 배우려고 하는 젊은 사람도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인기 좋았어요. 일하러 나가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사위 삼는다고 성화였으니까요.”

그렇게 일찍 시작한 굴삭기를 일을 그만 두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일을 시작할 때부터 ‘딱 20년만 하자’라는 계획을 세웠고 그 시기가 되어 정말 그만두었다. 굴삭기까지 팔고 다른 일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돌아간 곳은 굴삭기 운전석이다.

일을 그만둔 후에도 ‘중장비 사무실에서 잠깐 일 좀 도와달라’는 부탁이 있으면 나가서 일을 했고 준비하던 다른 일도 생각만큼 진척이 없었던 것도 요인이다. 그렇다고 지금 하고 있는 굴삭기 운전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굴삭기 일을 해주고 나서 ‘일이 잘 되었다’고 흐뭇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가장 보람되죠. 즐겁고요.”

간혹 정해진 일을 마치고 여름 장마에 조금 무너진 논두렁을 좀 올려붙여 달라는 부탁을 들을 때가 있다. 그 정도 일은 그냥 해줄 수도 있는 일인데 ‘괜찮다’고 해도 꼭 대가를 손에 쥐어주려는 농민들의 마음을 대할 때마다 찡한 감동도 다가온다. 시골의 훈훈한 인심을 그대로 간직한 사람들 속에서 운전석에 앉아 라디오를 들으며 토닥토닥 일을 해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볼링장 경영해보는 것도 꿈
그렇게 하고 싶었던 볼링 얘기로 다시 돌아간다. 김순수씨가 처음 볼링과 접한 것은 92년이다.  매일 좁은 공간에 앉아 하는 일이어서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볼링을 선택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 형들을 따라다녀 본 경험이 있어서다.

옥천에는 볼링장이 없어 대전으로 다녔다. 그러다 93년에 옥천볼링장이 문을 열면서 본격적인 옥천볼링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때부터 거의 매일 자신의 일이 끝나면 볼링장으로 가 동호회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김순수씨. 그 생활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근 10년이다.

“아직 하려고 하는 다른 사람이 없고 사람들이 좋아서 하는 거예요. 즐겁잖아요. 좋은 사람들과 저녁때마다 만나서 스트레스도 풀고 가끔 술도 한 잔하고.”

사정이 이렇다보니 충북 볼링계에서는 ‘김순수’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사람이 이름 그대로 순수하잖아요. 정말 순수해요. 누가 자기 일도 바쁘고 피곤한데 매일 저렇게 나와서 일을 봐주겠어요. 그러니까 동호인들도 따르는 거구요.”

군 여성대표이기도 한 연남숙씨의 얘기에서 그에 대한 동호인들의 신뢰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옥천군 볼링동호인들의 분위기를 전국 최고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매년 연말이면 군 대표를 선발하고 그렇게 선발한 대표선수들이 일 년 동안 노력해 도민체전에 옥천 대표로 출전한다.

그런 대표 선수들을 위해 300여 명의 동호인들은 정성을 모아 후원하고 옥천볼링장에서도 전용 레인을 마련해 마음 놓고 연습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 준다. 이런 동호회의 분위기가 10년 동안이나 그를 묶어 놓은 이유기도 하다.

“흥청망청 어울리는 것보다 이렇게 운동을 하면 스트레스도 풀 수 있고 좋지만 집사람이야 좀 섭섭할 수도 있겠죠. 들어가는 시간이 좀 늦어지니까요.”

그의 아내 김경일(40)씨의 반응이 궁금했는데 별 걱정은 없는 태도다. 6∼7년 전에 생활체육교실로 ‘볼링강좌’가 개설되었을 때 아내도 수강을 했고 지금도 볼링을 치고 있다. 하지만 남편정도로 빠져들지는 않은 상태인가보다. 직접적인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작전 아닌가 싶다. 아내가 볼링강좌를 듣도록 만든 것은 말이다.

◆익숙해진 것의 어울림
지나간 이야기들을 마무리하면서 앞으로의 이야기들을 꺼냈다. 이 시대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쉽지 않은 문제인가 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볼링장을 한 번 경영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역시 그랬다. 그의 머릿속에 최소한 50% 이상은 볼링에 대한 생각일 것이라는 추측이 맞은 것 같아 싱겁게도 괜히 우쭐해진다. 김순수씨의 답변에 주변에 있던 동호인들도 한바탕 웃음이다.

“그 얘기 신문에 나가면 옥천볼링장에서 안 좋아 할텐데….”
웃음 뒤에 한 마디씩 농도 오고 간다. 하지만 싫지 않은 웃음이고 악의 없는 농이다. 그만큼 옥천볼링계에서 김순수씨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굴삭기 연합회도 잘 해야죠. 얼마전에 체육대회를 했는데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더라구요. 모두들 좀더 자주하자고 그러고요. 요즘에 유가 인상이나 이런 저런 사정 때문에 다들 힘든데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보니까 좋더라구요. 지역에 힘든 일 있을 때는 우리 연합회도 발 벗고 나서야 할 거구요.”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얘기를 끝내고 군서면 상중리 골짜기 끝 포도밭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굴삭기 의자에 앉는 그의 모습이 썩 잘 어울린다. 오랜 세월로 익숙해진 모습은 타인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는가 보다. 작은 볼링공을 섬세하게 다루는 손과 육중한 굴삭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손은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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