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81] 옥천읍 가풍리
신마을탐방 [181] 옥천읍 가풍리
골목길, 옛 기억 간직한 채 그대로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5.11.04 00:00
  • 호수 7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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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솟을대문 안으로 들여다 본 송씨네 가옥. 지금은 주인이 바뀌고 빈집이지만 곳곳엔 대단했던 옛 전통가옥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

조금 지대가 높은 곳에서 가풍리를 내려다보면서 옛날 마을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사전에 마을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양지땀과 지풍, 윗가재골까지 골목길을 굽이굽이 누비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차 한 대 바듯이 들어 다닐 정도의 좁은 골목길에는 세월을 두며 켜켜이 쌓여온 이웃간의 정이 가득 묻어난다.

한 때 그곳을 가득 메웠을 동네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은 없지만 집집마다 한두 그루씩 서 있는 감나무와 개의 왕왕 짓는 소리는 골목의 정겨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동네 한바퀴 구경이 끝난 후 조금 높은 곳에 올라가 지붕을 전부 초가나 기와로 바꿔 놓으면 텔레비전에서나 간혹 볼 수 있었던 옛 마을의 모습을 내 머릿속으로 옮겨 놓을 수 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마을 면적
180번 째 마을로 소개했던 윗가재골. 가재가 많이 잡혀서 가재골이라고 불린 것 같다는 주민들의 증언과는 달리 옥천향지(관성동호회, 1984)에는 그 뜻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가자골의 원뜻은 솔티 고개를 넘어 가까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옛말의 가작골이 가자골로 음운변화가 된 것이다.”

설명을 듣자하니 그렇기도 하다. 아랫말을 포함한 가풍리를 취재하기 위해 마을을 찾았다가 강봉학(82) 어른으로부터는 가재골 지명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마을 뒷산에 있는 송씨네 선조 묘비명에 佳才洞(가재동)이라는 표현이 있다는 얘기였다. 가자동이라 불리던 마을이름을 그중 아름다운 한자를 골라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마을이 아름답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유래된 마을이름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여전히 가재가 많이 잡힌다는 것에는 모두들 한 목소리였다.

가재가 많이 잡힐 만큼 맑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마을임에는 틀림없다. 또 농사에 손재주가 많아서인지 예로부터 벼농사를 많이 짓고 지금은 포도농사로 고소득을 올리는 마을이니 한자로 표현한 마을이름도 아예 생뚱맞지는 않다.

가자골의 공간적 범위는 가풍리 전체다. 윗말(윗가자골), 아랫말(아랫가자골 혹은 양지땀, 가척), 지풍, 난쟁이라 불리는 곳을 모두 더해 주민들은 ‘가자골’이라 불렀다. 옹색한 경부선 철도 밑과 널찍하고 커다란 경부고속철 다릿발 사이를 지나면 널찍한 마을 안길이 삼청리 쪽으로 이어진다.

그 마을 안길 오른쪽으로 가척, 왼쪽으로 지풍이다. 그 마을 안길을 따라 솔밭까지 가면 지난 번에 소개한 윗가재골이다. 그리고 가풍리로 들어오다 경부선 철도 밑을 지나지 않고 곧장 직진하면 난쟁이 마을이 있다.

난쟁이 마을 앞길은 예전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려면 거쳐야 했던 중요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난쟁이에는 꽤 규모가 큰 주막이 있었는데 경부고속철을 놓으며 그 흔적이 모두 뜯겼다. 하지만 난쟁이를 지나 한양으로 향하던 그 길은 콘크리트 포장만 되었을 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이제 농기계 보기 힘들 걸”
가풍리 너른 들판은 수확이 끝나 휑하니 비어있었지만 마을 안은 투닥투닥 거리는 콩 타작 소리가 막바지 가을걷이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마을회관 근처에서 안대희(57) 이장의 집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콩 타작을 하다 마당에 앉아 조금은 늦은 점심을 하던 안 이장은 반갑게 자리를 권했다.

“콩이야 그냥 집에서 먹고 객지에 나가 있는 아이들 주려고 짓는 거고 포도나 배, 사과 같은 작물을 많이 하지. 옛날에는 벼농사 많이 짓는 마을로 유명했는데 요즘에야 누가 벼농사를 짓나.”

105호가 모여 사는 큰 마을 가풍리는 한 때 마을 전체가 벼농사의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54kg 한 포 기준으로 수매를 할 때도 3천 포대씩 수매물량을 배정 받곤 했던 곡창지대였다. 하지만 40kg 한 포 기준 수매로 바뀌면서 그 수량이 절반으로 줄더니 올해 공공비축미로 650포대를 배정 받았지만 600포대도 채우기 힘든 정도다.

“그러니 얼마가 줄은 거야. 그 자리는 대부분 포도가 차지하고 있지. 밭이 50ha, 논이 70ha인데 그중 2/3가 포도, 복숭아, 배 농사로 바뀌었어. 특히 포도농사 짓는 면적이 30ha로 제일 넓지. 그 포도밭에서 나오는 연간 배출만 10억은 넘을 거야. 또 농사를 잘 지어서 대부분 포전매매를 해. 일단 품질에 대해선 믿어주지.”

한참 포도농사 얘기로 흥겹던 안 이장이 농촌현실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는다. 지금 이 시대 농사 얘기를 하며 어찌 빼놓을 수가 있겠는가. 가구당 2.7명 수준인 280명밖에 안되는 주민 중 1/3 이상이 65세 이상 노인이다. 벼농사를 주력으로 지을 때보다야 덜하지만 여전히 시골에 부족한 노동력 문제는 심각하다.

“그럼 기계로 대체를 해야 하는데 이제 두고 보라고 정부에서 지원책을 내놓지 않으면 시골에서 기계 구경하기도 힘들어 질 꺼야. 콤바인 하나에 3천600만원씩 하는데 그거 한 달 남짓 쓰자고 살 수는 없잖아. 보름정도 쓰는 이앙기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벼농사를 어떻게 짓느냐는 얘기다. 앞으로 한 5년만 가면 쌀 때문에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게 안 이장의 얘기다.

◆처녀굴텅과 송씨네 집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콩 타작에 나서는 안 이장과 인사를 나누고 집밖으로 나선다. 그 곳에서 마을 새마을지도자인 정재준(63)씨를 만나 마을 안내를 부탁했다. 선뜻 앞장 서는 정 지도자를 따라 ‘처녀굴텅’부터 찾았다.

그 지명에서 주는 느낌이 사연을 가득 담은 듯하지만 아무도 그 지명의 내력에 대해 속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않았다. 안 이장의 집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처녀굴텅을 무서워했다는 얘기는 오고 갔다. 옆에서 듣던 곽일섭(49)씨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그 근처에서 넘어져 이가 부러진 경험을 얘기하며 “정말 귀신이 있는가 싶었다”고 농반진반 얘기를 거들었다.

처녀굴텅은 양지땀에서 윗가재골을 가다 중간쯤에 있었다. 도로가 넓어지기 전에는 야산의 자락이 흘러내린 지형이었다는 것이 정 지도자의 설명이었다. 양지땀의 인가가 끝나면서 윗말까지는 그냥 오솔길을 가야했을 옛날에는 불빛도 없는 그곳을 지나기가 꽤 무서웠을 것 같기는 하다.

“저기 저 감나무가 나 어렸을 때도 다 커서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던 건데. 한 100년은 족히 된 감나무일 거예요.”

정 지도자의 손끝에 서 있는 감나무는 한 눈에도 오랜 수령을 짐작케 한다. 처녀굴텅을 돌아나와 정 지도자와 함께 지풍마을 제일 위쪽에 있는 ‘송씨네 가옥’을 찾아갔다.

골목 끝자락을 막아선 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솟을대문이 예사롭지 않다. 문패를 보니 지금은 강석(67)씨의 소유다. 바로 옆집에 사는 일가 강봉학씨에 따르면 강씨의 할아버지가 송씨 문중으로부터 사들인 집이다.

솟을대문 왼쪽으로는 바로 붙어 담을 겸해 방으로 쓰던 두 칸짜리 아래채가 있고 오른쪽은 같은 규모의 헛간이 배치돼 있다. 솟을대문으로 들어가 마당에 서니 우리 전통가옥의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ㄱ자 한옥 한 채가 앉아 있다.

사람이 계속 살지 않아서인지 가옥에는 찬 기운이 스미고 곳곳에는 세월의 상처자국이 깊게 파여 있다. 집 주위를 정성스럽게 둘렀을 돌담은 상당부분이 허물어졌지만 옛 규모를 추정해 볼만큼은 되고 우물도 덮개가 씌어져 원래 있던 곳에 남아 있다.

좀더 관리를 잘 하면 우리 전통가옥 양식을 보존하고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쉬운 생각도 든다.

“송씨네가 문중 재실로 사용했던 것 같은데. 100년은 족히 넘지 않았겠어? 뒷산에 오르면 아직도 송씨네 묘가 남아 있어.”

강봉학씨가 말하는 뒷산은 멋진 한옥의 훌륭한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저 산에 예전에는 수목이 아주 울창했지. 특히 낙엽송이.”
“왜 옛날에 여기서 전신주로 쓴다고 너무 엄청이 베어 갔잖아요. 그 때 좋은 나무는 다 베어가고 지금은 못생긴 것들만 남아서 저렇게 크고 있는 거죠.”

쭉쭉 뻗은 낙엽송이 아름답게 수림을 형성했던 아름다운 지풍마을 뒷산을 정 지도자도 기억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돌아 나오며 다시 뒤를 돌아본다. 고속철이 염치없게도 마을의 하늘 한쪽을 잘라먹었지만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에 따뜻한 정과 이야기를 가득 담은 가풍마을이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담배 농사 지면 부자될 줄 알았는데”
마을에서 만난 사람 - 한기섭·유지은 부부

▲ 콩을 두드리며 옛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는 한기섭(왼쪽), 유지은씨 부부.
마을회관 맞은편 너른 공터에는 부부가 나란히 앉아 벽돌에 콩자루를 두드리고 있었다. 마른 콩깍지를 벗어버리고 튀어나온 노란 콩이 바닥 사방에 뒹굴뒹굴 거린다. 한기섭(78)씨와 유지은(74)씨 내외다. 이제 결혼한 지 58년째다.

‘할머니 이름이 왜 이렇게 이쁘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병원에서 간호사도 그러고 다들 그런다며 수줍은 웃음을 짓는다.

“이름을 지어준 할아버지가 좀 배운 분이셨어. 그래서 신식으로 지어주었나 봐.”

구읍에서 소위 잘나간다던 집 처자와 결혼을 한 한기섭씨는 젊어 공무원생활을 했다.

“그 때 공무원 월급으로는 살 수가 없었어. 근데 담배농사 짓는 사람들을 보니까 금방 부자가 될 수 있을 거 같더라구. 그래서 공무원 그만두고 와서 해보니까 어디 그게 되나. 잘 안되지. 자기 직업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들은 어차피 없는 거여.”

옆에 가만히 얘기를 듣던 할머니가 “으이그, 그냥 자원봉사 한 거지 뭐.”라고 한마디 툭 거든다. 얼마나 힘들었던 세월인지 쉽게 짐작이 갈 정도로 말이 무겁게 바닥에 내려앉는다.

“곱게 자란 할머니가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그래도 지금 자기가 호강시켜줬다고 떵떵거리는데.”

한기섭씨를 향해 흘기는 눈이 밉지 않다. 감 따러 나무에 올랐다가 떨어져 몸이 영 불편한 할아버지 걱정이 한 가득이다. 할머니는 내년부터 농토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겠다는 결심을 확인이라도 하듯 입 밖으로 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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