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방' 세월의 장막 뒤로 사라지고
'약방' 세월의 장막 뒤로 사라지고
함께사는 세상 [133] 안내면 현리 삼성약방 박란과씨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5.10.07 00:00
  • 호수 7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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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약방 박란과씨

노인을 만났다.
50여 년 동안 한 길을 걸어와서인지 얼굴엔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당당함이 짙게 묻어 있는 노인이었다. 안내면에는 유일하고 옥천 전체를 통 틀어보아야 네 곳밖에는 없는 `약방' 주인이다. 

안내면 현리, 안내우체국 건너편에 있는 그의 삼성약방은 겉으로 보기엔 세월의 무게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큰 통유리가 달린 미닫이 섀시 문으로는 따뜻한 햇볕도 들어올 듯하고 약방 내부의 각종 보관함도 흰색페인트로 깔끔하게 정리돼 주인의 성격을 짐작케 했다.

다만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낯선  ‘약업사 자격증’만이 공간이 간직하고 있는 세월을 말해주는 듯하다. 조제는 할 수 없지만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약을 판매할 수 있는 약방은 과거 충분치 못했던 작은 지역 의료체계에 약국을 대신해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박란과(77)씨는 안내면의 약방을 지키는 마지막 약업사다.

◆70대의 마지막 약업사들

박란과씨가 약방을 하게 된 것은 군에서의 인연 때문이다. 의무관련 요원으로 6년이나 군 생활을 했다. 운전병과 의료계통 군인들의 경우에는 ‘보류특기병’으로 다른 병사들에 비해 군생활이 길었기 때문이다. 

제대를 하고 잠깐 고향인 안내면 용촌리에서 농사일을 거들다가 시험이 있어 자격증을 취득하고 본격적으로 약방을 시작했다. 안내면 정방리에서 그의 나이 29살 되던 해다. 

“그 때만 해도 약방이 참 많았지. 옥천군에만 약방을 하는 사람이 36명 정도 있었으니까. 그 때 그렇게 모임하면 참 재밌었는데. 왜 유유상종이라고 그러잖아.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얘기하면 재밌었어.” 

그 때를 생각하며 환한 미소를 짓던 박란과씨가 손가락을 꼽으며 먼저 약방에서 은퇴한 사람들의 이름을 끄집어 내 본다. 하지만 섭섭함이 깊어지기 전에 얼른 셈하는 것을 그만두고 만다. 그가 정말 아쉬워하는 것은 자신의 세대가 끝나가는 것과 동시에 ‘약방’도 함께 기억 저편으로 묻혀져야한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자녀들 중에 누군가 약국을 차려주길 은근히 바랐지만 잘 되지 않았고, 안되면 약국을 하는 며느리를 얻어 볼까 했는데 그 역시 여의치 않았다는 얘기를 툭 던진다. 그 말에는 꽤 무거운 아쉬움이 얹혀 있다. 

“지금 약업사들이 전부 일흔다섯 살이 넘어. 작년에 서울에서 총회가 있어가지고 가보니까 여든을 훌쩍 넘긴 분들도 있긴 하더라구. 더 이상 자격증 시험이 없으니까 이제 그 사람들 죽으면 약방도 없어지는 거지 뭐.”

◆씻은 듯 나은 모습 최고의 보상

빗줄기가 오락가락 하던 날에 찾아온 낯선 이방인과의 얘기가 깊어지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소위 잘 나가던(?) 시절로 흘러간다. 

“한 참 바빴을 때는 두세 명을 두고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어. 밥도 제대로 못 먹었지. 장이라도 서면 아침 일찍 나온 사람들이 약방 앞에 길게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렸으니까.” 

한참 잠자고 있는 새벽에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주민을 따라 약을 챙겨들고 집까지 찾아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을 참을 만큼 참고 민간요법을 모두 동원한 뒤에야 약방을 찾았다. 

어려웠던 시절인지라 약값 제대로 못 받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병원 하나 변변히 없는 곳에서 약방은 주민들에게 그만큼 절실했던 곳이었을 게다. 그래도 뒤돌아보면 돈보다 더욱 소중한 것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었기에 손해는 아니라 생각한다. 

“올해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침 일찍 문을 열고 건장한 남자가 데굴데굴 굴러서 들어와.  ‘배가 아파서 죽겠다’는 소리도 간신히 할 정도로 아파하는 거야. 저러다 죽지 싶어서 의자에 눕혀 놓고 약을 먹였더니 한 10분 지나서 말짱하게 일어나더라구. 내가 준 약을 먹고 그렇게 일어나는 걸 보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사실 그 재미로 50여 년 동안 약을 만지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돈 때문이었다면 그렇게 긴 세월 약방을 움켜쥐고 있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삶 후회는 없어 

“내가 약방을 안 했다면 아마 공무원을 했을 거야. 그럼 한 20년 전에 그만 두었겠지.” 

만약, 이라는 질문만큼 어리석은 물음도 없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질문에 대한 박란과씨의 대답은 명쾌했다. 공무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제일 크지만 약방 주인을 선택한 것에 대해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는 답이었다. 

“돌이켜보면 참 재밌게 살았어.” 

창밖을 내다보는 박란과씨의 표정이 깊어진다. 저 나이에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보며 ‘재밌었다’고 저리도 무심히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이 받으면 그것에 대한 대가는 어떤 형식으로든 반드시 되갚아야 해. 하지만 봉사하는 삶은 행복하지. 먹고 사는 것만 생각하면 나중에 후회해.” 

“아버지는 저희 어렸을 때도 항상 저 말씀이셨어요. 서울에 회의 있어서 갔다 오실 때는 지금으로 치면 노숙자 한 분을 데리고 오셔서 한참을 같이 있었다니까요. 또 공부는 잘 했어도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오빠 친구도 도와주셨구요. 저희한테는 그게 좋은 교육이 된 것 같아요.” 

마침 몸이 불편한 어머니 전규식(77)씨를 보기 위해 들른 맏딸 박덕분(56)씨의 얘기다. 83년에 모범도민상을 받은 것도 이런 선행 때문이었다.

◆약방 문닫는 것 아쉬움 남아

약방에 머물며 박란과씨와 함께 보낸 두 시간 동안 약방을 찾은 손님이라곤 안약을 사기 위해 들른 주민 한 명 뿐이었다. 지역 주민 수도 줄고 교통이 좋아지면서 이제는 통계를 내기도 불필요할 정도로 손님은 급감했다. 그래도 박란과씨는 여력이 닿는 데까지는 약방문을 계속 열어 둘 생각이다. 급하게 약이 필요한 주민과 사랑방 삼아 약방을 찾는 사람들 때문이다. 

“이 집이 지금은 팔린 상태야. 내후년 2월이면 계약이 만료되기 때문에 집을 비워줘야 해. 그 때까지 할 수 있는 체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해봐야지. 그래도 보건지소도 있고 하니까 주민들도 큰 불편은 없을 거야.” 

안내면에 있는 삼성약방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이제 길어도 2년이 채 남지 않았다는 얘기다. 자신의 약방 문을 닫아야 할 시점을 얘기하는 박란과씨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할멈하고 산지 60년이야∼”

   
▲ 아내 조규진씨의 손을 꼭 잡은 박란과씨의 얼굴엔 애정이 가득했다.

얘기를 나누는 중간 중간 할아버지는 약방에 딸린 방에 다녀오곤 했습니다.

알고 보니 방에 누워 있는 아내 전규식(77)씨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크게 소리를 질러 애써 방문객과 인사를 시키는 것도 할머니가 조금이나마 일어나 걷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는 걸 쉽게 알아 챌 수 있었습니다. 

“몸만 건강했으면 좋겠는데. 저렇게 자꾸 병이 침노해서 큰일이야. 사람이 좀 강단지고  모질면 저렇지 않을텐데. 마음이 너무 여려서 그랩.” 

아들뻘 되는 낯선 손님에게 자신의 아내에 대해 한걱정을 하는 모습에 가슴이 찡할 정도였으니까요. 알고 보니 올해가 할아버지 할머니의 결혼 60주년이랍니다. 의미가 있는 회혼례를 올릴 수 있을 만큼 오랜시간 함께 했습니다. 열일곱에 안남면 종미리에서 옆 마을 안내면으로 시집을 온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든든한 동반자였습니다. 

“키도 훌쩍 크신 것이 젊었을 때 상당히 미인이었을 것 같다”는 말에 할머니는 쑥스럽게 손사래를 치십니다. 

“저 사람이 셈은 참 빨라요. 약방이 바쁠 때는 옆에서 셈을 해주었지. 나보다 훨씬 잘했어. 이제 아프지나 말아야 하는데.” 

새로 생긴 동네 목욕탕에 따뜻한 물이 끊기기 전에 다녀오자는 이웃과 함께 문을 나서는 할머니에게 우산을 챙겨주며 할아버지는 역정을 냅니다. 

“약방 유리 닦았지? 이건 왜 닦아. 힘들게. 애들 오면 시키면 되는데….” 

아무런 대답 없이 뒷모습만 보이며 걸어가는 할머니는 분명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결혼 60주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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