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함께사는 세상 [130] 마지막 남은 군서면 88군번을 만나다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8.12 00:00
  • 호수 7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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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서면 동평리 충혼탑에서 만난 참전용사 3인. 왼쪽부터 최희종(78), 한창석(74), 김희석(80)씨

지난 8일 군서면 동평리 충혼탑에서 참전용사 세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전장에서 한 떨기 꽃으로 진 전우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88군번인 이들은 매년 8월8일이면 먼저 간 전우들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들은 어제처럼 생생하게 54년 전 여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일부 대화를 재구성했음을 밝힌다. - 편집자

전쟁이다. 옥토에 심어진 모가 땅 냄새를 어지간히 맡았을 6월의 어느 새벽 시작된 전쟁. 인민군의 파상적인 공세로 전쟁발발 2개월 만에 낙동강까지 밀려간 국군은 그 여름 인민군의 대 공습을 견뎠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9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소식과 함께 수도 서울의 탈환소식이 그 바람을 타고 전쟁의 공포에 지친 사람들의 귓전을 스쳤다.

9월이 채 지나기도 전에 백두산을 향한 국군의 북진작전은 시작됐고 전쟁은 곧 끝날 것 같았다. 마치 씨름판에서 금방 꼬꾸라질 것 같았던 선수가 절묘한 뒤집기 한판을 성공하려는 듯 보였다. 무슨 난리가 났는지도 모르고 전쟁이라는 낯선, 그러나 섬뜩한 말에 놀라 아래로, 아래로 피난을 갔던 사람들도 정신을 수습하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러나 한반도라는 씨름판에서 벌어진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의 바람처럼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중국이 지친 인민군을 대신해 샅바를 잡은 것이다. 삼팔선,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한양’을 차지하기 위해 엄청난 화약을 서로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힘의 균형점이 되어버린 삼팔선을 중심으로 두 나라가 가진 모든 힘을 그곳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곳은 남과 북 모두에서 엄청난 젊은이들의 피를 부르고 있었다. 전쟁이 난지 열 달 쯤 지난 그 무렵의 이야기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빼앗겼던 서울을 재탈환했던 1951년 3월15일. 그 무렵 그들을 부르는 사지(死地)로 달려간 옥천의 세 젊은이들이 겪었던 이야기다.

◆1951년 3월25일 군서초교 운동장

‘입영을 축하합니다’

누군가 써서 달아 둔 현수막이 학교 한 귀퉁이에서 펄럭거린다. 현수막 아래로 군서면 각 마을에서 입영영장을 받고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집결한 청년들이 보인다. 마흔다섯 명이다. 스물 너덧 살 무렵의 청년들이다. 월전리부터 은행리까지 마을마다 비슷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이 대상이 됐다.

“어! 창석이도 왔네? 너 임마 몇 살인데 입대를 해. 아직 스무 살 안됐잖아?”

평곡마을 김희석(25)이 은행리 사는 한창석(19)을 발견하고 놀란 눈을 한다. 한참 어린 동생 녀석이 전쟁에 나간다고 나와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응, 면에서 영장이 나왔는데 내 형이랑 나랑 둘 다 입대하라고 나왔어. 그래서 동생인 내가 입대하겠다고 하고 형 앞으로 나온 영장은 일단 취소를 시켰어.”

담담하게 사정을 설명하는 창석은 희석 눈에도 더 이상 코흘리개 동생이 아니다. 창석의 어깨를 잡은 희석의 팔에 조용히 힘이 들어간다.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온다더라. 그래서 전방에 군인들이 부족해서 난리라네. 그러니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막 입대 시키는 거야.”

물끄러미 둘을 지켜보던 최희종(23)이 한 마디 거든다. 상지리 사는 희종은 희석과 두 살의 나이 차가 있지만 군서초 동기동창, 둘도 없는 친구사이다. 창석의 입대를 지켜보는 그의 마음도 친구 희석과 다를 것이 없다.

◆군산, 제주도 그리고 88군번

교정 연단에 오른 면 병사계 직원의 몇 가지 안내사항을 듣고, 또 학교까지 따라 나온 가족들과의 짧은 해우를 마치고 청년들은 옥천으로 이동한다. 유유히 흐르는 서화천을 바라보며 정든 길은 걷는 마흔다섯 명의 청년들은 다들 말이 없다.

지난 열 달 동안 숨어서 지켜보던 전쟁이었는데 이제 군인이 된다. 그리고 싸워야 한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다. ‘꼭 살아서 이 길을 걸어 내 고향 마을로 돌아와야 한다.’ 군서초등학교에서 걸어 출발한 길이 어느 사이 벌써 옥천역이다. 입영열차는 그들을 태우고 군산 대기소를 거쳐 다시 배로 바뀌었고 제주도 신병훈련소까지 도달했다.

“김희석!”
“예! 이병 김희석”
“니 군번이다. 외워!”
〈8812037〉 김희석의 군번이다.

약 100일 간의 신병교육을 마친 싱싱한 이등병들에게 군번이 부여됐다. 이른바 88군번. 전국 팔도에서 모인 청년들과 함께 같은 날 군서면에서 온 마흔 다섯의 청년들에게도 88로 시작하는 군번이 부여됐다. 가장 치열한 전투에 투입될 불운의 군번. 바로 88군번이다.

◆88군번, 전원 전방, 예외는 없다


“희석아! 나도 수도사단 소총수야!”
소속부대를 확인하고 반가운 마음에 희종이 군서초 동기동창 희석을 부른다. 희석과 희종은 나란히 수도사단 소총수로 배치됐다.

“희종아. 창석이는 8사단 소총수로 배치됐다더라. 같은 부대면 마음이 좀 편할 텐데...”
“괜찮아. 8사단에도 군서사람들 많이 배치됐다니까 걱정 안 해도 될꺼야.”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 지 잘 알고 있었다. 그 곳은 사지(死地)였다. 최전방 매일 수천 수백의 푸른 영혼이 하늘로 돌아가야 하는 곳, 최전방이었다.

‘삐리삐리∼∼ 꽹꽹꽹∼∼∼둥두둥 둥둥∼∼’
김희석 이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다. 수도사단에 전입신고를 한지 사흘 만에 투입된 전투. 소총 한 자루 움켜지고 분대원들과 함께 소대장을 따라 나선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누군가의 입에서 ‘포위됐다’는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중공군이 사방에서 이상한 악기소리를 내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는 상황이다. 공포가 고립된 병사들을 엄습하고, 소대장의 표정에서도 쉽게 당혹감을 읽을 수 있었다.

“포위망을 뚫고 탈출한다. 소대원 전원은 나를 따르라.”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탄소리 사이로 소대장의 퇴각명령이 전해진다. 김 이병의 앞뒤에 있던 전우들 몸속으로 ‘툭- 툭-’ 쇳조각이 박히는 소리가, 외마디 비명이 그의 고막을 파고 든다.

“야! 김 이병... 나 좀 데려가 줘... 김 이병”

누군가 그를 부르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전진하는 부대의 부상병은 살아도 퇴각하는 부대의 부상병은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2005년 8월 8일, 그들을 다시 만났다

“아직도 생생한 것은 말이야. 그때 그 부상병들이 울면서 데려가 달라던 목소리야. 내가 겪은 첫 전투에서 포위를 당하고 소대원이 전멸하다시피 하면서 탈출하던 그 날 그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아.(김희석·80)”

“난 중공군들이 꽹가리 치면서 죽창들고 밀고 내려오던 모습이 생생해. 아편에 취해서 죽으러 가는지도 모르고 웃고 있었지. 죽이지 않으면 죽는게 전쟁이지. 아무튼 난 수도고지 전투에서 총알을 세 방이나 맞고 살아났어.(최희종·78)”

“아이구, 전쟁 나가서 그렇게 안 싸운 사람들도 있수? 기자양반한테 옛날이야기는 해서 뭐한다고 허허...(한창석·74)”

그들을 다시 만난 곳은 군서면사무소 앞 충혼탑이었다. 그들은 88군번을 기념하며 벌써 23년째 매년 8월8일(88군번이라 이 날로 잡았단다) 이곳에서 전우들을 위한 제사를 올리고 있었다.

“우리 88군번은 자대배치 받은 그날부터 휴전으로 발포금지 명령이 떨어진 53년 7월27일 10시까지 전사하지 않았으면 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불행히도 전사자가 가장 많아요. 군서면에서 같은 날 입대한 마흔다섯 명 가운데 전쟁이 끝나고 귀환한 전우들은 고작 열네 명 이었어요. 이젠 그나마도 다 죽고 몸이 아파 거동이 힘든 사람 하나, 그리고 우리 셋이 남았지요.”

군서면 88군번의 막내 한창석씨가 담담하게 제사의 목적을 설명했다.

“우리가 그 처절한 전투를 견디고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 있는 것이 다 우리 전우들이 보살핀 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제사를 모시고 있어요. 전쟁을 경험해 보지 못한 젊은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죽을 때까지 8월8일이면 이곳에 모일껍니다.”

김희석씨가 흐뭇한 표정으로 제사 준비를 마친 제단을 바라보며 웃는다.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물었다. 무엇을 기원하셨느냐고. 세 용사의 답변은 같았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다시는 이 나라에서 제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잔인한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몸소 겪은 전쟁의 가장 큰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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