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동이면 가덕리 쇠보루여울·옆쪽골여울
[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동이면 가덕리 쇠보루여울·옆쪽골여울
강변 따라 안남장 가던 길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5.07.01 00:00
  • 호수 7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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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랫청동마을이 가까운 옆쪽골여울 언덕 위에 선 사람들. 왼쪽부터 이용재(71), 정석주(78, 옆 얼굴 보이는 이), 박희철(75), 정수병씨이다. 물레방아가 있던 흔적이 그대로 있는 현장에서 이들은 추억에 잠겼다.

겨울에는 강자갈이 발바닥에 쩍쩍 달라붙었던 곳, 여름엔 살을 놓아 물고기를 잡고, 물길을 돌려 물레방아를 돌렸던 기억이 있는 곳이 여울이었다. 불과 30∼40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건너다녀야 했다. 조금이라도 가고자 하는 곳까지 걸어가는 거리를 짧게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여울을 건넜다.

여울은 그렇게 사람들의 생각을 모아두는 길이었다. 어려웠으나 그것은 숙명이고, 으레 그렇게 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던 길이었다. 얼음 위를 미끄러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걸려서 우시장에 소를 내다 팔아야 했고, 막걸리 한 사발로 하루 끼니를 때우며 한 고개를 넘어 두 고개를 넘다가는 허기가 져서 넘기가 힘들다는 이유로 ‘허기재’라는 별칭이 붙었던 것도 여울을 건너던 우리 어른들의 한스런 기억도 스며있는 곳이다.

동이면 가덕리 마묵골을 내려서서 지난 1999년 안남면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된 쇠보루 마을에 이르는 ‘쇠보루여울’과 바로 하류쪽의 아랫청동 마을 아래의 ‘옆쪽골여울’이 오늘 우리가 가는 길이다.

◆자동차로 쉽게 올 수 있는 길을…
오전내내 내리지 않던 비가 여울로 떠날 시간이 되어서는 남쪽 하늘부터 깜깜해지더니 세찬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쩔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일단 약속은 해놓은 상태, 20여분 있으니 빗줄기가 약해진다. 다행이다 싶다.

동이면 적하리에서 여울지기 정수병씨와 합류해 고속도로 폐도를 따라 가는 길. 여전히 비는 오지만 걱정할 상황은 아니다. 동이면 우산리에서 폐도를 내려가 청성면으로 향하는 도로를 들어섰다. 어느덧 고당리 높은벼루, 강촌, 원당을 지나니 상합금에 청마리 마티마을에 강건너로 보이고 이제는 포장도로의 끝 지점인 하금리까지 도착했다.

금강물을 본다. 그리 불지는 않은 듯하다. 이것도 다행이다. 상류에 비가 그만큼 내리지 않아 수위가 높아지지 않은 까닭이다. 차를 타고 가자니 그동안 지나친 여울이 차례로 떠올려진다. 우산리 지매골여울부터 대밭골여울, 중소여울, 새재여울, 어신여울, 말여울에 더디기여울까지 많은 여울도 지나쳐 왔다. 자동차로 이렇게 쉽게 오는 길을 옛날엔 두 발로 다녔을 터다.

어려운 시절을 살아낸 어른들의 인내심, 오늘의 젊은이들 세상을 일군 그 저력은 정말이지 대우받아야 할 무한정의 힘이다. 이제 여울은 금강의 상류에서 자꾸자꾸 하류로 달린다. 마을이 길게 형성되어 있다 보니 여울도 많다.

가덕리 더디기 마을 앞에 있는 더디기여울을 갔을 때 설명을 해주었던 이용재(71)·박희철(75)씨를 다시 찾았다. 근 한 달만에 만난 얼굴들이라 반갑다. 이분들 이외에 또 한 분이 합류했다. 가덕리 아랫청동 마을의 정석주(78)씨다.

◆합금·조령·청마, 안남장 다녔던 쇠보루여울
쇠보루여울은 보통으로 봐서는 여울같지 않다. 보통 여울이라면 물이 쌀쌀거리고 흘러야 하고 바닥에 차여 물이 흐르는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야 여울같아 보인다. 그런데 쇠보루여울은 별 물흐름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잔잔한 흐름이다. 비가 온 뒤 물량이 늘어나기도 했겠지만 그와는 별도로 이곳은 예부터 물 흐름이 잔잔했다는 게 함께 동행한 이들의 한결같은 설명이다.

물흐름이 잔잔해 많은 사람들이 건넜다는 곳이 쇠보루여울이다. 쇠보루여울은 큰 교통로였다. 가덕리 더디기 사람들이 나무하러 다니고, 농사지으러 다녔던 여울일뿐더러 장에 다녔던 사람들이 건넜던  큰 길 구실을 한 곳이다.

동이면 조령리 사람들과 청성면 합금리, 고당리 사람들, 동이면 청마리 마티 사람들은 이 쇠보루여울을 건너 안남장에 갔다. 안남장에 가는 데에는 합금리 사람들은 두 차례 여울을 건넜다. 합금리에서 어신여울을 건너거나 말여울을 건넌 후 허기재로 불리던 마묵재를 넘었다.

고개를 넘는데 어찌 주막이 없었을쏘냐? 마묵재 날망에도 부부가 운영하는 주막이 있었다. 고개를 오르느라 숨이 차고 목이 말랐던 나그네는 막걸리 한 사발에 목을 축이고 그 힘으로 여울을 건너 장에 가곤 한 것이다. 동이면 조령리 새재 출신으로 청마초교와 안남초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이종하(현 옥천향교 전교)씨도 마묵재를 넘어 쇠보루여울을 건너 안남장에 다녀왔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마묵재를 내려서면 바로 쇠보루여울이다. 마묵골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이 쇠보루여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청성면 합금리 쇠보루 마을이어서 쇠보루라는 여울 지명이 붙여졌다.

안남장이란 말 자체가 이제는 사람들의 추억을 길어올리기에 알맞은 말이다. 안남장은 이들 오지 사람들이 가기에는 가장 가까운 장이었다.

쇠보루여울을 건너 행렬은 금강변을 걸었다. 금강변을 걸어 안남면 지수리 수동을 지나쳐 종미리 미산을 거쳐 연주리로 들어갔다. 장터가 있는 연주리 소재지까지 강변길이 더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수리 수동 사람들의 텃세(?)가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텃세? 어른도 마찬가지여. 수동 주막을 지나다 보면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으레 막걸리 한 사발씩 얻어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한 번은 합금리에서도 등치 큰 사람 넷이 노루를 잡아 오는데 수동 마을의 한 사람이 오더니 노루를 몸을 밟고 같이 먹자고 하데. 그런데 그 등치 큰 사람들이 꼼짝을 못하고 같이 먹더라구.”

이용재씨가 신이 났다. 마침 6·25전쟁 얘기가 나왔다. 당시 스무살이던 박희철씨는 인민군들을 구경한다고 마묵재까지 갔더란다. 그런데 말재를 통해 넘어오던 후퇴하는 누런 군복의 인민군들이 오더란다. 무서워서 꼼짝 못하고 있었는데 인민군들이 속리산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하더란다.

박씨를 비롯한 어린 축은 무서워 뒤로 빠졌고, 박씨보다 더 나이가 든 이가 결국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다. 마묵재에서 보니 쇠보루여울이 빤히 보였다. 그래서 인민군들은 가덕리 큰 마을인 더디기로 들어가지 않고 막바로 쇠보루여울을 건넜다.

길안내를 맡은 이는 쇠보루여울을 건넌 후 틈을 이용해 길가 도랑으로 빠져 수동에서 합금리쪽 산을 돌아 마을로 되돌아왔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 사람은 아마도 속리산까지 갔을 지도 모를 것이란 것이 박씨의 말이다. 쇠보루여울은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억하며 흐르고 있다.

◆첫 물레방아 있던 옆쪽골여울
쇠보루여울의 하류 100m쯤 되는 지점에 형성된 여울이 있다. 옆쪽골여울. 골짜기의 이름이 옆쪽골이란다. 물을 쌀쌀하게 흘러가는데 제법 물살이 세다. 이곳에 물레방아가 있었다. 그 물레방아를 돌렸던 흔적은 물길을 돌리느라고 쌓아놓은 돌무더기에서 찾을 수 있다.

아랫청동 마을에 사는 정석주씨의 매형인 임영철씨가 50∼60년 전에 물레방아를 운영했다. 안남면 미산에 있던 물레방아를 제외하고는 인근에서 가장 먼저 세운 물레방아였다. 안남면 지수리 수동에 발동기로 돌리던 방아가 있었으나 빻는 삯이 물레방아가 더 싸다 보니 여울을 건너 옆쪽골여울에 있는 물레방아로 몰렸다.

물레방아를 쌓느라고 많은 돌이 소요되었다. 이때에 인근에 있는 돌에 백묵으로 가격을 써넣으면 그걸 들고온 장정들에게 지불하는 방식으로 일을 시켰다. 그렇게 쌓은 돌이 큰 홍수가 지기를 몇 십년인데 흔적이 이처럼 남아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옆쪽골여울에 설치했던 물레방아가 운영되면서 이후 더디기여울에 물방아, 말여울에 물방아, 우산리까지 물레방아가 설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용재씨의 회상이다. 말하자면 옆쪽골여울의 물레방아는 이후 상류지역 물레방아 설치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여울로는 정석주씨가 학교를 다니느라고도 많이 드나들었다. 이제는 상주하는 가족이 세 세대에, 잠시 들어와 휴식을 즐기는 세대까지 포함해야 6세대가 남아 있는 아랫청동 터줏대감인 정석주씨는 안남초등학교 다닐 때를 회상하며 강물을 바라본다.

“옛날에는 강변이 다 잔디밭에다가 고운 모래나 자갈이었는데! 참 아까워. 이렇게 풀이 무성한 것은 댐이 막힌 후에 진흙이 쌓이고 해서 불과 24∼25년만에 변형된 거여.”

이십 수년간의 세월 변화 속에 가덕리 금강변은 사람 키까지 자라는 억새와 잡풀 등으로 뒤덮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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