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동이면 가덕리 더디기여울
[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동이면 가덕리 더디기여울
용굴 전설에 마묵재 허기졌던 옛추억 아련히...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5.06.03 00:00
  • 호수 77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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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슬비 까맸던 더디기여울 강변은 이제 낚시꾼과 행락객 차지가 되어 버렸다. 똑바로 건너면 여울이었고, 물레방아를 놓았던 석축이 어렴풋이 보인다.

어신여울과 신달여울을 거친 금강물은 이곳 더디기여울에서 가덕리 사람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여울은 우리 서민들의 가장 큰 교통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배가 움직일 수 없을 때 서민들의 통행로가 되었습니다.

더디기여울을 건넌 사람들은 주로 가덕리 더디기마을 사람들입니다. 더디기여울은 지금 휴일에는 행락객들과 낚시꾼들이 몰리는 자연발생 유원지로 변했습니다. 여울지기 정수병씨와 이용재(71·가덕리), 박희철(75·가덕리)씨가 여울의 추억을 더듬었습니다.

◆마을 진입로 세월교는 옛 물레방아 막았던 돌길
이 길은 청성면 합금리다. 청성면 합금리 하금마을에서 끊긴 아스팔트 포장길은 흙자갈길을 이루며 안남면 지수리 수동마을까지 이어진다. 어신여울과 신달여울이 합금리 하금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비포장 길이 짧았지만 더디기여울까지 이르는 길은 비포장 길이 제법 길다.

충청북도가 관리하는 지방도이긴 해도 비포장인 이 곳은 흙자갈길의 운치가 남아 있는 곳이다. 차가 교행할 때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쓰기 마련이긴 해도 옛날에 비하면 도로 상태는 양반이다. 어쨌든 그냥 아스콘으로 뒤덮어 버리기엔 아까운 길이다. 이 길을 이제 사람들이 많이 오간다.

특히 안남면 지수리에서 동이면 조령리 금강유원지까지 금강을 끼고 휘도는 이 길의 풍광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다시 찾게 되는 길이고,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청마리 탑신제가 이루어져 외지인들의 발길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이 여울은 마을이름을 따서 더디기여울이라고 불렀다. 지금이야 23가구 정도지만 한창 많을 때는 38호까지 집들이 있었단다. 큰 마을이 더디기였다면 마묵골에는 세 가구까지 살았다. 더디기보다 하류기는 하지만 이 곳도 가덕리.

더디기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금강을 가로지르는 세월교다. 지난 92년에 놓은 세월교가 비스듬히 건설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물레방아 흔적 많아 추억 더해
이곳 여울 자리에 물레방아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는데 물을 모으기 위해 쌓았던 돌 흔적대로 다리를 건설하다 보니 비스듬히 건설된 것이었다. 세월교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주민들에겐 더욱 값진 일이었다.

다리를 건너 자동차가 마을까지 들어오던 순간, 마을 주민들은 너나 할 것없이 감격했다. 이용재씨가 이장을 맡아 마을 일을 볼 당시였다.

“차가 처음 동네로 들어오니까 사람들이 환장하더라구. 다리 놓는데 돈이 모자라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 애로고 어쩌고 지금같으면 그렇게 못할껴.”

강 건너에서 봐도, 합금리쪽 강변에서 보아도 물레방아를 돌렸던 흔적이 뚜렷하다. 쌓은 돌은 합금리 강변쪽 도로 높이까지 거의 올라갔다. 더디기 강변 쪽에서 보면 성을 쌓은 것처럼 흔적이 확연하다. 벌써 40∼50년 전에 돌았던 물레방아는 흔적으로 남아 여전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마을에 살던 이창주(지금은 작고)씨가 물레방아를 만든 장본인. 이용재씨의 설명으로는 주민들이 품삯을 받고 돌을 쌓아 물길을 막는 일을 하기도 했고, 추렴해 일을 해주기도 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물레방아를 고정시키려 했을 나무 말목 몇 개가 수십 년 동안 썩지 않고 강변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 수십 년간 물에 잠긴 나무치고는 아직도 짱짱한 면모를 보여주는 이 나무말목은 여울지기 정수병씨의 말을 빌면 ‘아마도 밤나무일 것’이란다.

이 물레방아에서는 벼와 보리는 물론 밀까지 빻았다. 우리 밀이 이제 서양 밀가루에 밀려 거의 경작되지 않는 희귀작물로 변해버린 요즘이지만  불과 40여년 전에는 우리 밀이 광범위하게 재배되었음을 확인하는 말들이다. 인근 합금리와 고당리에서 방아를 찧기 위해 이용했다.

여울은 물레방아 바로 아래에 있었다. 여울과 관련한 얘기로 빠지지 않는 얘기가 있다. 한겨울 나뭇짐을 지고 어떻게 여울을 건넜느냐는 추억담이다. 강건너 도로변의 합금리 산은 상당히 가파르다. 언뜻보아도 45도 경사는 돼 보인다. 이런 길을 나뭇짐을 지고 내달렸다. 박희철씨.

“겨울인데도 나뭇짐을 지고 산을 내려오면 땀이 흠뻑 나. 그러면 여울로 바로 뛰어들지. 땀이 식으면 추워서 못 건너. 싸게(빠르게) 건너야 덜 춥지. 자갈밭에 나오면 그냥 자갈이 쩍쩍 달라붙었어.”

◆“이노무 강이 큰 웬수지, 웬수!”
고무신 구경은 못하고 짚신을 삼아 신고 다니던 50여년 전의 모습이었다.

“나? 겨울에 여울은 못 건넜어. 배로 건너 다녔지. 얼음 못 건너. 죽어죽어.”

이용재씨는 겨울 여울은 건너지 못했단다. 추위를 타서라고. ‘죽어죽어!’하는 표정이 압권이다. 더디기여울은 대부분 더디기 사람들이 건넜던 여울이기에 고스란히 마을 사람들의 추억이 담겨 있다. 더디기 사람들이 가는 장은 여러 개다. 우선 가장 가까운 장이 안남장이었다.

안남장에 팔 곡식이 많을 경우 배로 여울을 출발해 안남면 연주리 독락정까지 왕래했다. 중간에 여울이 있기는 하지만 물길을 아는 마을 사람들에겐 별다른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독락정까지 배로 실어다 놓은 곡식은 차량으로 장터까지 옮겼다. 물론 이것도 안남장이 폐지되기 전까지의 일이다. 안남장 말고는 심천장과 이원장, 옥천장을 이용했다.

심천장을 가려면 배를 타고 가서 합금리 열묵재를 넘어서 고당리 원당 앞으로 가서 산을 넘어야 했고, 이원장에 가려면 허기재라고 불린 마묵재를 넘어 마티마을을 지나 먹절재로 넘었다. 가장 큰 장은 옥천장. 옥천장은 마묵재를 거쳐 마티마을에서 말재를 넘어야 했다.

마묵골로 넘어가는 고개인 마묵재는 인근에서 ‘허기재’로 불렸다. 옥천장의 우시장을 다녀오던 마을 사람들이 제대로 밥도 못먹고 하루 종일 걸어서 넘어 갔던 길을 되짚어 넘어오는데 더디기나 마묵골 사람들은 큰 고개인 말재를 넘고도 또 한 고개(마묵재)를 넘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는 데서 유래된 고개 이름이다.

“요즘은 올뱅이(다슬기, 도슬비)가 없어. 그전에는 마을 쪽 강변으로 까맸어. 종자까지 다 잡아가고, 위에서부터 진흙이 내려와서 죽은거지 뭐!”

어느새 변해버린 금강 환경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사람들에게 강은 어떤 의미였을까? 이용재씨의 말이 비수처럼 박혔다.

“이노무 강이 큰 웬수지, 웬수!”
마묵골 용이 승천했다는 용굴 전설

▲ 용굴전설현장에 선 정수병, 박희철, 이용재씨(왼쪽부터)
그 용은 언제 하늘로 올라갔는지 모른다. 그저 어른들이 전하는 말로 용은 존재했다. 너비 2m가 넘는 굴이 있었다. 이 굴은 어릴 적부터 무서움의 대상이었다. 굴을 보려다가는 흙에 미끄러져 빠질까봐 가까이 가서 구경도 못하고 애꿎은 돌만 던져 넣을 뿐이었다. 그러면 한참 후에 ‘풍덩’하던 돌 빠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아마도 수 천미터는 되었을껴!. 나는 그렇다고 봐. 어른들이 용이 올라갔다고 했응께 그렇다고 봐야지. 그래서 용굴 아녀.”

이용재(71·동이면 가덕리 더디기)씨의 말. 이씨는 이미 청성면 합금리와 가덕리를 잇는 상류 어신여울과 신달여울을 다녀갈 때 도움을 받았던 터라 낯이 익다.

“전설대로 용이 올라갔거나 아니면 지진이겄지. 전설에는 용이 올라간 후 3일간 흙탕물이 강가까지 내려왔다는 거여.”

함께 동행한 박희철(75·동이면 가덕리 더디기)씨가 거들었다. 마묵골 용굴 전설이 있는 산기슭 밭에서 금강까지는 직선거리로 얼핏 500여m 거리다. 이들이 어릴 적만 해도 있었던 굴은 차츰 메워지기 시작했다. 굴이 메워져 옆의 밭과 같이 된 것은 지금부터 20여년 전쯤이라고 이들은 기억했다.

최근에도 굴삭기로 땅을 메워 보통의 밭처럼 돼버린 전설의 현장. 그래도 전설의 현장은 흙이 내려앉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지금은 숲으로 변하기 직전의 밭이건만 전설의 현장은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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