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내(구읍)
옥천읍내(구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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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9.11.27 00:00
  • 호수 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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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옛도읍지(서울)를 살펴보면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아 주변에 아름다운 산이 있고 강이 흐르며 주변환경이 조화를 잘 이루어 사람살기가 좋고 편리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듯 한 고을을 정하는데는 산과 물의 음양과 땅의 지기와 주변의 조화를 잘 이룬곳에 촌락을 이루었고 그중에 가장 발전한 곳에 고을이 형성되었다.

옥천은 옛날 신라때 고리산(古尸山)이었는데 경덕왕때 관성이라고 했다. 옛날 이곳은 백제와 신라의 국경 변방지역으로써 국도확장으로 인한 전쟁이 잦아서 축조된 성이 많고 사람들의 성품이 대죽같이 곧고 나라에 충성심이 많아 붙여진 뜻의 이름이다. 그후 한때는 옥주라고 부르던 것을 조선 태종 13년(1413)에 옥천이라고 고처 오늘에 이르렀다. 옥천은 땅이 기름지고 비옥하며 내가 흘러 강을 이루고 산은 수려하고 인심이 좋을 뿐만 아니라 전주에서 상주로 가는 관도(지금은 37번국도)가 이곳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으며 또한 부산에서 서울로 오고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사람살기가 편리한 곳이라 했다.

옛날 구읍을 옥천읍내라고 불렀다. 이곳은 죽향, 문정, 상하계, 동안, 교동리 5개 리를 가리킨다. 이곳에 고을을 정한 것은 풍수지리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며 영산인 백두산에서 태백대간으로 기(地氣)가 흘러 명산 속리산과 계룡산으로 뻗어내린 그 가운데 옥천이 자리잡고 있어 서북쪽은 산이 있어 바람을 막아주어(藏風) 양지 바르고 앞에는 안산인 돌남산과 고서인 만산도(萬山圖)에 기록된 함박산이 있고 주변에는 아름다운 산들이 쌓여 있으며 내가 동에서 남으로 휘돌아 서쪽으로 흘러 나가고 밖으로는 비단물결 굽이치며 휘돌아 유유히 흐르는 금강이 있어 장풍득수(藏風得水)가 잘 되어 구읍에 관아를 두지 아니하였나 본다.

풍수지리는 오늘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아니하였으나 오래전부터 내려온 학설에 의하여 맥이 이어왔다. 요즈음에는 통계학에 접목하고 있다. 원래 풍수지리의 기원은 AD 4세기 중국 동진시대의 풍수의 대가인 곽박의 저서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말엽 도선국사(827~898)가 당나라에 가서 배워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흥선대원군은 인간의 길흉화복이 풍수지리에 영향이 있다고 하여 부친의 묘를 이장한 후 발복하여 아들 고종이 왕위(1864)에 오르게 되었다하니 그때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옥천(구읍)은 풍수설과 관련하여 고찰해 볼 때 첫째, 형상론(形象論)으로 보면 동쪽의 깃대봉(마성산)에서 내려온 산줄기와 무시랭이의 산세와 형태가 힘있게 이어진 것이 형기론(形氣論)에 부합된다.

둘째, 이기론(理氣論/태극과 음양)으로 볼 때 동서쪽으로 휘돌아간 물길의 흐름에 따라 죽향리에다 관아를 짓고 향을 문정리로 정하여 햇빛을 잘 받게 했다(오향/午向). 셋째, 형물론(形局論)에 있어서 산제와 모양은 주봉인 마성산과 만두인 죽향리 뒷산의 지세지기가 힘있게 내려 우백호인 무시랭이 뒷산이 서쪽으로 삼거리까지 삐쳤고 좌청룡인 산줄기가 교동, 대성사-샘실-옥천상고-옥천고교-삼양리 토성, 삼거리에서 머물렀다(석즉인신지골/石卽人身之骨).

이와 같이 산줄기와 산이 물이 잘(용혈사수/龍血砂水) 갖추어 있기에 이곳에 고을(관아)을 정하지 않았나 본다. 다음 마을에 붙여진 동네이름(리명)을 살펴보면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 행정구역을 일제히 개편하고 자연마을을 합쳐서 새로이 지금의 법정 리동 이름을 한자의 뜻을 따서 지리 및 역사적 연고와 형상 및 이기(음과 양)에 의하여 동네이름을 지었다.

구읍 전체를 양택(집의 구조)으로 비교해서 볼 때 집과 같이 잘 짜여져 있다. 옛날 사대부집의 구조는 안채 뒤 서북쪽에 찬바람을 막아주는 창풍이 있고 상징적인 대나무가 대부분 심어져 있으며(죽향), 부엌문 가까운 곳에 샘(우물)이 있고 또한 사립문(대문)이 안채의 방위로 놓였다(문정). 허한 방위(동안)는 방안에서는 병풍을 둘러치고 집밖으로는 나무로 가리고 울 밖으로는 내가 흐르고(상하계) 가까운 거리에 학당이 있으면 금상첨화라고 했다.

▲죽향리란 이곳에 관아가 있어 뒤뜰에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앞에는 향나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깊은 뜻으로는 죽(竹)은 곧고 굳은 절개와 충성의 의미로 불사이군. 일부종사라 했다. 정절을 지켜서 수절하고 사는 뜻에서 절(節)은 죽(竹)을 뜻한다. 그래서 죽은 귀하게 썼다. 우리는 지난날 형상과 뜻을 중하게 여기면서 살아왔다. `한예로써' 대례청(결혼식)에 신랑쪽에 소나무와 장닭을 놓고 신부측에는 대나무와 암탉이 대례청에 올려 놓는 것을 보았다. 향은 관아의 위엄과 신성한 자리를 뜻하며 외부로 퍼지는 훈훈한 바람과 부드러운 향기를 뜻한다.

▲문정리란 옛날 관아의 아주 좋은 샘이 있고 사람이 들고 나가는 문의 뜻도 있겠으나 죽향리를 안채집으로 볼 때 양택에서는 동사택의 샘(우물)의 위치는 부엌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고 사립문과 대문은 남쪽에 향을 두고 있고 고수골에서 냇물이 상하계리를 거쳐 문정리로 흘러 삼거리를 파구(破口)가 되고 주변은 비옥(토즉인신지육/土卽人身之肉)하며 관도(37번 국도)가 있어 들고 나가는 길목이라고 하여 문정리라 붙여진 이름이다.

▲상하계리의 위치는 죽향리에서 동남향에 계수나무가 있었고 내가 흐르니 옛날에는 물은 몸의 피(수즉인신지혈/水卽人身之血)라고 중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름다운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본다.

▲동안리는 관아의 동쪽에 위치하여 언덕(岸)이 흡사 병풍같이 둘러 쌓인 것 같은 형상을 보고 이름을 지었다고 볼 수 있다. ▲교동리 당시 학문을 가르치는 곳이 향교였다. 향교는 지금의 학교다. 향교는 지방에 있는 가장 큰 교육기관이다. 그래서 교자와 동자를 붙여서 지은 이름이다.

위와 같이 옥천읍내(구읍)는 관아를 중심으로 형상과 이기(음과 양)에 의하여 동네 이름이 붙여졌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하여 기술한 것이 아니고 가신 선현들의 사람방에서 주고 받은 말씀을 엿듣고 이제서야 잊어져간 희미한 추억을 더듬어 지리오결에 바탕을 두어 필(筆)을 들고 보니 옛말 생각이 난다.

산좋고 물좋은 곳에 인물이 난다고 하듯 이곳은 현대사만 생각해 보아도 시인 정지용, 영부인 육영수 여사, 공화당의장 정구영, 국회의원 정구삼, 권복인, 육인수, 이용희 의원 등 많은 출중한 인물이 이 고장 사람이니 生居舊邑 必有揚名(생거구읍 필유양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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