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동이면 마티리 '말여울'
[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동이면 마티리 '말여울'
높은재... 큰여울... 말티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5.02.18 00:00
  • 호수 7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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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여울. 마을이름이 말티, 고개 이름도 말재. 마을에서 계곡을 타고 말재로 올라가는 굽은 길목은 말부리다. 이 마을 곳곳의 지명은 온통 ‘말’ 자가 들어가 있다. 마을 지명이 한자화되면서 부르게 된 마티에 ‘말마(馬)’가 들어가 있으니 흔히 말과 관련된 지명을 연상한다.

▲ 말여울에 선 사람들. 왼쪽부터 김동식, 정수병, 최도근씨. 오른쪽 돌이 물레방아 흔적이고 바로 아래가 여울이다.

인근에서 가장 컸던 `말여울'

그러나 이 말자는 타고 다니는 말이 아니라 ‘크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옥천향지 출처) 크다는 말은 곧 장수, 머리, 왕 등의 뜻으로 풀이된다. 그만큼 높은 재를 뜻하고 여울 또한 큰 여울이라는 뜻이겠다. 말과 관련한 전설도 있다. 말부리라는 곳은 옛날 삼국시대에 한 장수가 말을 타고 말재를 넘어오다 굽이진 길에서 방향을 틀지 못해 그대로 굴러 떨어져 목숨을 잃었던 곳이란다.

이 전설은 마을에서 말재를 오르는 길목에 있던 큰 바위에 써있던 글에서 비롯되었다. 말재를 오르는 굽이진 길목에 있던 큰 바위에는 한문이 빽빽하게 쓰여 있었는데 약 40년 전 통행이 나쁜 길을 바로 잡는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깨졌다. 그 바위에 무슨 글이 쓰였을까?

선친 최홍규 선생에게서 이 바위에 쓰인 글의 내용을 들었다는 최홍규(75·옥천읍 거주)씨는 옛날(삼국시대라고 추정) 말부리에서 죽은 장수를 애도하는 글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한다. 최씨에 따르면 말티는 전쟁과 관련한 지명이 이곳 저곳에 박혀 있는 전장이었다.

말부리 근처의 평탄한 곳이 둔전밭(둔전은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의 식량을 자급하기 위해 마련한 밭)이고, 가장 높은 봉우리의 이름이 성재이다. 보청천을 따라온 신라의 병사들이 말재를 넘어 옥천으로 진출했을 길목에 바로 말여울이 있었다. 싸움터와 관련한 지명을 듣고 나서야 옛 신라 병사들의 고단한 숨결이 느껴진다.

말여울은 가장 큰 교통로였다. 정작 말티 사람들은 과일을 내다 팔 때 주로 이용했던 심천장의 길목이었으나 이 길이 아니면 가덕, 청성면 고당, 윗쇠대, 아랫쇠대 등 합금리 사람들은 옥천장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말여울이다.

“그전에는 허기라는 것이 있었어!”

40여년 전 얘기지만 옛날에는 곡식장과 소장은 옥천장을, 과일장은 심천장을 봤다. 우시장을 보기 위해서는 새벽 두세 시면 나와 여울을 건너야 했다. 그것이 겨울인 다음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소를 앞세우고 여울을 건너면 깨진 얼음조각에 벤 정강이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고, 말티 입구 주막에 들러서야 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말재를 올랐다.

얼음이 얼면 소장에 가는 합금 사람들은 멍석을 얼음 위에 번갈아 깔아 소가 얼음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했다. 소가 얼음에 한 번 미끄러지면 일어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소 발굽에 짚신을 신겼다. 합금리 최문근(65)씨도 어렵게 소장을 찾았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막걸리도 먹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말재 올라가다 찬 물이나 한 줌 들이키고 갔지. 그렇지 않으면 고구마나 몇 개 삶아서 말재 가서 먹기도 하고.”

옛날을 회상하는 김동식(74)씨에게서 옛 기억들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아주머니들이 고생 많이 했어. 지금이야 소장이 새벽에 서지, 옛날에는 오후나 저녁 때 섰어. 해전 소를 걸려서 우시장에 도착하면 오후가 넘잖어. 소 팔러 갔다 오면 한밤중여. 하루 종일 막걸리 몇 사발 이외에는 먹은 게 없으니 허기지지. 그래서 장에 갔다 온 사람들이 누구 말재에 있다고 하면 아주먼네들은 죽을 쑤어 말재까지 올라가서 데리고 와야 했지.”

허기재도 있다. 말티에서 가덕리를 넘어가는 강변길을 가다가 나오는 고개가 허기재다.

“말재를 넘어 오면 다 왔다고 했는데 가덕 사람들은 또 하나 고개를 넘어야 하잖아. 허기진 데다 고개를 하나 더 넘어야 했으니 오죽했겠어. 지금이야 뭐라도 사먹으면 된다지, 옛날에는 ‘허기’라는 것이 있었어.”

최도근(78) 노인회장의 회상이다.

“여울 바로 위 물레방아 흔적 그대로”

여울은 지금의 세월교 바로 위에 있다. 아직 물살이 세차다. 그 위로 옛날에 운영했던 물레방아가 있었다.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기는 했어도 흔적은 그대로다.

“근 40년 넘었지 아마. 박주하씨가 물레방아를 만들 때 금암리 새말, 압촌에서 청년들이 와서 큰 돌은 70원씩도 받고, 작은 돌은 5원씩도 받으면서 일을 했어.”

그 물레방아가 위, 아래 쇠대마을을 물길로 돌아다니며 보리를 받아다가 방아를 찧었다. 곱게 빻아야 하는 밀은 옥천장에 가야 했지만 보리방아는 마을에서 할 수 있었으니 나름대로의 구실을 한 셈이었다.

말여울은 물살이 세서 합금리에서 마실을 왔다가 돌아갈 때에도 강가까지 와서 배웅을 해주었다. 말티에 놀러왔다가 물이 불어 못 건너갈 때에는 윗쇠대 건너편까지 가서는 말티에서 자고 가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소리를 쳐 연락을 했다.

금강을 잇는 여울이 있어 주민들끼리는 친한 이웃으로 지낼 수 있었다. 지금은 폐교된 청마초등학교는 마을 사람들이 땅을 희사하고, 말티는 물론 가덕, 합금, 고당, 새재 사람들까지 모두 나서 단단하다는 가죽나무 가져오고 금암리 오교택씨의 아버지가 도목수가 되어 지었다. 해방 후 들이닥친 병술년(1946년) 수해로 주저앉은 집을 다시 지은 것이 현재의 학교다.

최도근 회장도 땅을 희사했던 것처럼 청마 학교는 이들 주민들의 땀과 정성, 노력이 깃들인 고향 같은 곳이다.

“말재를 넘어 동이학교하고, 죽향학교 고등과를 다녔는데 길 가운데 사과 껍데기가 있는거야. 웬떡이냐 하고 주워와 잘 씻어 먹었지. 지금마냥 농약을 친 것도 아니고, 배가 부른 사람이니 사과를 깎아 먹었지 않았겠어. 그런 횡재를 다해봤네 그려!”

말여울과 관련한 마을 얘기는 먹절 마을 위 먹절재의 대추나무 전설에 이르기까지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김동식씨를 따라 먹절마을에 들어가 조명숙 이장에게서 차 한 잔을 대접받은 후 어둑해진 다음에야 말여울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말티 산제 지내는 산제당 소나무는 `우뚝'

   
▲ 마티마을 사람들이 산제를 올리는 산제당 소나무.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군내에서 가장 바쁜 마을은 마티마을이다. 탑신제를 지내야 하기 때문. 마을 사람들의 운을 따져서 별 탈이 없는 사람으로 제주를 정하는 일부터 일은 시작된다.

그중 마을의 안녕을 비는 산제는 대보름 탑제와 솟대제, 장승제를 지내기 전인 새해를 맞아서 바로 이루어진다.

올해의 제주 최도근 노인회장은 지난 정월 초사흗날 밤에 산제를 지냈다. 최도근 회장과 먹절에 살고 있는 토박이 김동식씨의 안내로 가본 곳이 산제를 지내는 소나무. 산제를 지내는 소나무는 마을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해발 533m의 성재를 오르는 등성이에 있다. 웅장한 소나무.

옛날에 지내던 소나무는 죽었고, 다른 소나무가 대신하고 있다. 한 아름은 넘는 소나무의 나이를 얼른 가늠하기는 힘든데 지난해 폭설 때문인지 굵은 가지 하나가 부러져 있다. 하지만 산제 소나무이기 때문에 베거나 건들지도 않는다.

“한밤중에 여기 와서 산제를 지내려면 옛 말에 호랑이가 소나무 위에서 잘 지내나 지켜보고 있다고도 했어. 소나무 사이로 쉬이 하니 바람 불어봐. 기분이 묘하지.”

산제 후 산신 먹으라고 남겨놓은 떡과 과일 등은 벌써 깨끗이 없어지고, 창호지만 남았다. 산제 지낸 음식이 재수가 있다고 가져갔을 것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내려오는데 멀리 내려다 보이는 세월교와 여울, 물레방아 흔적이 한 폭의 풍경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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