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57] 동이면 지장리
신마을탐방 [157] 동이면 지장리
느티나무 아래 옹기종기, 마을이 인심을 만든다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5.02.04 00:00
  • 호수 7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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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장리 주민들이 걷기운동을 끝내고 마을회관에 모여 모처름 단체사진을 찍었다.

조선팔도 안다니는 데가 없다는 건설업자 장윤재씨는 시골 아담한 곳에 정착하고 싶었다. 여기저기 유랑하는 직업인지라 정을 붙이고 살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부산서 태어나 학창시절부터 서울에서 보낸 장윤재씨의 부인 이봉옥(48)씨는 과연 시골에서 살 수 있을까 하고 반신반의하며 서울을 떠나길 싫어했다.

이봉옥씨의 큰언니 부부와 함께 안남 지수리 수동으로 낚시여행을 떠날 때도 남편 장윤재씨는 부인에게 살 곳 좀 물색해오라고 당부했지만, 못들은 척하고 그냥 올라온 것도 아직 맘이 다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딸 효진이와 중학교 2학년이었던 광석이의 학교 문제도 큰 문제였다. 하지만, 남편 장윤재씨의 의지는 완강했다. 혼자 어디론가 훌훌 다녀오더니 느닷없이 이사를 결정했다. 그 때가 92년도이다. ‘동이면 지장리’. 이름도 듣도 보도 못한 그 생소한 곳을 찾아가려고 이삿짐을 쌌다. 아직 수북리 ‘안터다리’가 만들어지기 전이다. 다리를 만들려고 공사해놓은 토대가 질퍽거려 이삿짐이 훌떡 넘어갈까 얼마나 가슴 조렸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사 결정부터 그 과정까지 이봉옥씨에겐 지옥이었던 것이다. 시골생활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자신에게 수차례 되물었을 것이다. ‘잘 할 수 있겠느냐고?’ 걷고 또 걸어 고갯길까지 왔을 때 큰 느티나무가 보였다. 그 고개 너머에는 도무지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한참 오르막길에 올라 세 아름 정도 되는 그 큰 느티나무 언덕에 다다랐을 때 이씨의 가슴은 지옥같은 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와! 탄성을 질렀어요. ‘마을이 참 아름답구나’라고 느꼈죠. 아니 아름답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지장리 첫인상을 보고 반해버렸어요.”

도무지 앞이 보일 것 같지 않던 칠흑같은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산 아래 오롯이 숨어있는 마을 지장리는 그 마을 풍경 그대로 새이웃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이씨가 나름대로 맘에 그렸던 유토피아를 지장리가 그대로 재현해냈던 것이다.

하지만, 풍경이 아무리 좋아야 사람이 싫으면 가기 싫어지는 법.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은 달리 나온 말이 아니다. 고갯길을 따라 답답했던 마음 한켠을 허물고 가볍게 마을 초입에 들어섰을 때, 그는 두 번째 잊지 못할 감동을 받는다. 이씨네 이삿짐이 마을 입구에 도착했을 때, 마을회관에 사이렌이 울리며 방송이 나왔다.

“서울에서 장윤재씨네 가족이 우리 마을로 이사를 왔습니다. 모두 나와 환영해줍시다. 그리고 다같이 도와 이삿짐을 날라줍시다.”

그 방송이 나옴과 동시에 도인들만 살 것 같은 집들에서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씨는 지금도 그 날의 가슴 따뜻한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참 행복했어요. 마을 풍경에 반해 어느 정도 답답했던 한 울타리를 헐어냈는데, 마을 사람들의 소중한 인정이 걸쳐있던 마지막 울타리까지 싹 걷어내 버렸어요. 이사를 준비하면서부터 걱정했던 것들이 그 날 몇 시간 만에 일거에 해소된 거죠. 그만큼 지장리는 매력있는 마을이었어요.”

그 이후로 장씨의 아들 광석(28)이와 딸 효진(25)이는 옥천중과 군동초를 모교로 하는 완전한 옥천 사람이 됐다. 지장리에 스며든 지 2년 후, 이봉옥씨는 자신의 생애동안 전혀 할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부녀회장에 추대되고, 그로부터 몇 년 후 동이면 새마을부녀회협의회장에 피선될 정도로 시골살림에 잘 적응해갔다.

이봉옥씨는 말했다. 시골 사람들의 순한 인심이 내성적이고 수줍던 자신을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바꿔놓았다고. 그녀는 10여년 넘게 지장리 마을 부녀회장을 맡고 있다. 그 당시 마을 사람들이 이삿짐을 날라줘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한 수줍은 ‘새댁’은 이제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체크하는 마을 건강도우미가 되었고, 마을 일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임하는 막강 부녀회장이 됐다. 사람은 자연의 풍광을 그대로 닮아가기 마련인가보다.

큰 산이 여유있게 품고 있는 마을 지장리는 그 푸근한 인심처럼 사람을 아름답게 바꿔놓았다.

종이 마을부터 최대 양잠단지까지
지장리(紙匠里). 말 그대로 쉽게 풀이하자면, ‘종이를 만드는 장인’을 뜻한다. 마을이 종이와 연관돼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마을 지명에 관한 정확한 문헌자료가 전해오는 것은 없으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된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고려말엽에 장수황씨가 처음 들어와 살면서 주변에 자생하고 있는 닥나무를 이용해 한지를 만들어 팔았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이 마을이 지장리로 불려졌으며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는 현재도 마을 밭둑에서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마을에는 종이를 만들었다는 흔적이나 기구 등은 현재로선 찾아볼 수 없고, 마을 주민도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만 들었을 뿐 실제로 종이를 직접 만들어 본 경험은 없는 실정이다.

지장리의 고대를 ‘닥나무’가 상징한다면, 지장리 현대의 상징은 바로 ‘뽕나무’라 볼 수 있다. 서남향으로 안온하게 자리잡은 이 마을의 특작은 한 때 양잠으로 꼽혔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68가구에 달았던 이 마을은 진입로 사정상 별다른 특작을 할 여건이 못 됐으나, 80년대 들어 양잠의 가격이 높아지자, 마을의 모든 농가 중 80%이상이 양잠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누에 1장(10그램, 1만마리)에 30∼40만원을 호가했고, 1년에 5∼6천만원은 거뜬히 벌었단다. 누에 3∼4장이면 자식들의 학비 뒷바라지는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정부수매가 끊기면서 판로확보가 어려워졌고, 중국산 누에고치가 들어오면서 이 마을 양잠산업은 사양길로 들어선다.

현재 마을에서 유일하게 양잠을 하는 주민은 박영권(68)씨 혼자. 계약주문 형태로 뽕나무 500주에서 뽕잎으로 누에고치를 키우며 약용으로 판매하고 있단다.

양잠의 사양화로 한때 마을 밭면적의 60%까지가 뽕밭이었던 지장리는 뽕나무가 뽑히고 깨, 콩, 고추 등 일반 작물이 심겨졌고, 주민들도 양잠대신 인근 김치공장에 취업을 하는 등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수 백 년에 걸쳐 지장리를 지켜온 닥나무와 뽕나무는 종이와 비단을 만들어냈고, 그 종이와 비단은 지장리를 키워냈다.

왕바위와 돌탑, 그리고 느티나무
보통 다른 마을의 산제가 정월대보름을 기해 모셔지고 있는 점에 비해 이 마을의 산신제는 음력정월초하루에 시작되며, 대보름 전날인 음력 열나흘날에는 마을 앞 느티나무와 돌탑, 그리고 두꺼비가 웅크려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왕바위’ 등 세 곳에서 고사를 지낸다.

지장리는 변한 것이 없다. 풍경도 고스란히 살아있고, 마을 인심도 그대로다. 지장리는 마을 화합이 잘 되는 대표적인 마을로 손꼽힌다. 수북보건진료소 박춘희 소장은 “지장리는 다른 마을에 비해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운동도 잘 하고 있다”며 “마을 풍경만큼 인심도 좋은 동네”라고 칭찬했다.

마을은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일 줄 안다. 원토박이가 80%가 넘을 정도로 오래된 마을이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배타적인 심성은 없다. 지난해 댄스스포츠도, 올해 걷기 운동도 신명나게 받아들여 자신들의 것으로 체화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마을 기금 200만원을 들여 운동기구를 들여놓았다.

발전하는 마을 인심은 여전
진입로가 새로 생기고, 마을 풍광이 좋은 탓인지 최근에는 심심찮게 이사 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십년 전 32가구에 불과했던 마을은 34가구로 늘어났고 현재 7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 옛날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수답이라 물이 펑펑 쏟아졌던 지장리 수답은 이제 똘을 쳐서 말리려고 해도 말려지지 않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지장리 마을 사람 인심만큼은 변함이 없다. 출향인 최복근(68·미국 거주)씨가 매년 40만원씩 보내주고, 황종연(62·서울 거주)씨도 마을에 필요한 기금을 지원해주고 있다. 청주에 사는 출향인 최옥성(64)씨도 경로당의 기름값을 보내 줄 정도로 출향인의 관심도 많다.

400년 넘는 수령의 느티나무가 가만히 지장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곳곳에 닥나무와 뽕나무가 지장리의 어제와 오늘을 말해주고 있었다. 모든 것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역시 지장리 주민들의 마음이었다. 지난 1월31일 지장리를 방문한 그 날 오후에 눈이 펄펄 내렸다. 어둑어둑 해지고 마을 집집마다 불이 하나둘씩 켜질 무렵 한 사람이 나와 지장리 고갯길을 천천히 쓸고 있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혼자서 그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측에 속한다는 50대 김오복씨였다. 눈발이 휘날리는 지장리를 떠날 무렵, 김오복씨가 쓰는 비질소리가 아주 포근한 음악처럼 들렸다.

“곧 아이 울음소리 듣겠지”
조준길 이장

“이 곳이 옴팍하니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어 인심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다른 마을에 가려면 한참을 나가야 하고, 싫으나 좋으나 여기 사는 사람 얼굴 제일 많이 보는데, 이웃간에 인심이 안 좋을 수가 있나? 사람 심성이 나쁘면 이 마을에서 배겨나질 못해요. 원토박이가 80%가 넘어서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이고 서로를 너무 잘 아니까 사이가 좋을 수밖에.”

사람들 좋기로 유명한 지장리 마을 이장 조준길(65)씨가 나름대로 내놓은 분석이다.

조 이장은 아직 마을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은 세운 것이 없으나 마을 주민들이 마을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만큼 언제든 계획이 세워지면 잘 추진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준길 이장은 마을에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없어 아쉽긴 하지만, 곧 아이를 가진 젊은 부부들도 이 곳을 찾게 될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매주 월·수·금요일 오후 3시 지장리 앞을 지나면 걷기 운동을 하는 지장리 마을 주민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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