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55] 청성면 상·하 귀곡리
신마을탐방 [155] 청성면 상·하 귀곡리
귀곡리 주민 12가구, 옹기종기 '한가족'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1.21 00:00
  • 호수 7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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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귀곡 큰대문집 이경출 할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다.

겨울이 이제 시작됐다고 호들갑떤 것이 엊그제 같은데 큰 추위는 다 지난 것 같다는 말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흘러나온다. 유독 가문 겨울이라 눈다운 눈 한 번 안 왔지만, 어쨌든 동장군이 이렇게 조용히 물러나 주기만 한다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촌사람 입장에서 겨울 한 철 무사하게 보내는 것만큼 다행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눈 구경은 지난봄 지겹도록 했으니 가물지 않는 선에서 일기예보대로 큰 고생없이 봄을 맞이했으면 하는 생각으로 차창 밖 겨울 풍경을 흘린다. 오늘 찾을 곳은 귀곡리의 다섯 개 자연마을 중 지리적으로 가운데 위치한 상귀곡과 하귀곡이다. 귀곡리의 동쪽 끝이 지령, 서쪽 끝이 소목이라면 그 중간에 자리를 잡고, 건너 마을 귀평 평짓말을 마주하고 있는 마을이 상귀곡, 하귀곡이다.

그 위치상의 특징으로 하귀곡이 귀곡리 마을회관을 품고 있지만 마을자체의 가구 수는 상귀곡이 7가구, 하귀곡이 5가구에 지나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모두가 농민인 상·하귀곡 12가구의 주작은 벼농사이며, 밭에서는 콩, 인삼, 고추 등이 약간씩 재배되고 있다.

▲귀곡(貴谷)의 비밀(?)
‘귀곡산장’ 이 있었다. 귀신이 나오는 시골에 외딴 집을 뜻하는 이 말은 한때 TV오락프로그램에서 소재로 사용하면서 깊은 산골자기 외딴 마을을 나타내는 보편적인 말이 됐다. 공교롭게도 귀곡마을과 같은 이름의 이 ‘산장’ 때문에 지명을 처음 듣는 이들 가운데는 혹시나 하는 연관성을 궁금해 하기도 한다.

지명의 한자표기가 귀곡(鬼谷)이 아니니 지명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어 보인다. 또 구절양장의 험로를 통해야만 찾을 수 있는 오지도 아니니 ‘귀신’이 나올 만큼 깊은 ‘골짜기’는 아니라고 해야 할 것 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그랬을까?

하귀곡 이윤월(53·귀곡리 고향메주대표)씨의 말을 들어보자.  “남편과 약혼을 하고 서울에서 마을로 내려오던 날이 생각나요. 오후 5시에 도착 예정이던 완행버스가 마을 앞 국도에 날 내려준 게 밤 8시였거든요. 정말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보였어요. 신고 있던 부츠를 벗고 손으로 땅을 더듬어 기다시피 상귀곡까지 내려왔어요. 마을 가까이 오니까 호롱불을 켜 둔 집이 보이데요. 얼마나 무섭던지...”

역시 하귀곡에 사는 이외남(65)씨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영동 황간에서 43년 전 마을로 시집 온 이씨도 마을에 첫 걸음을 딛던 그날을 떠올렸다. “황간에서 석탄을 싣는 트럭을 타고 신랑과 함께 지금 청성주유소가 있는 서낭당 자리까지 왔어요. 거기서 가마를 타고 마을로 들어왔는데, 그때 마침 마을에 초상이 있어 피해 들어오느라 질마재로 돌아서 들어왔어요. 어두운 밤에 생전 처음 돌담을 봤어요, 얼마나 으스스하던지...”

도로포장이 기대하기 어렵던 시절 마을로 시집온 두 새색시에게 귀곡은 ‘귀신 나올 만큼 깊은 골짜기’였나보다.

▲귀한 것은 ‘사람’
사실 귀곡마을에 ‘귀신’에 얽힌 전설은 없다. 차 구경하기 어렵고, 전기 불빛 귀하던 시절에 어느 마을인들 밤이 화려(?)할 수 있었을까. ‘귀곡산장’과 귀곡마을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렇다면 귀곡의 한자표기인 貴(귀할 귀)는 어떤 유래를 가지고 있을까.

“오늘 보은에 장이 서는데 이런 날에는 웃말(상귀곡)에 나를 포함해서 딱 세 사람만 남아요. 아주 심심해 죽겠어요. 동네에 사람이 있어야 뭐 재미가 나지...버스 값 올라서 여기저기 다니기도 무섭고, 심심해요 심심해...”

상귀곡 안종예(71)할머니, 마을에 사람이 귀해 재미가 없다며 푸념을 한다. “마을회관이 있어도 마을에 주민이 워낙 없다보니 늘 비어있어요. 오늘같이 마실 나와도 찾아 볼 집이 두 세 집이고요.”

안 할머니 설명을 듣고서야 마을회관이 늘 비어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귀곡리 마을총회 때 말고는 사람구경이 힘든 마을회관, 귀곡은 사람이 귀한 마을이다. 

“지금 마을을 이끌어 가는 50대 서넛이 70대가 되는 20년 뒤 마을이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어요. 그 사이에 도시에서 농촌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귀곡에 그런 날이 올지 예상하기는 힘드네요.”

30년 이상의 공직생활을 정리하고, 98년 고향마을로 돌아온 양진원(64)씨는 노령화와 인구감소로 인한 귀곡의 어두운 미래를 걱정한다. “농사일이 수익성이 있으면 농촌 공동화문제가 나오지도 않았겠죠. 농지거래도 활발할 터이니 농가의 주머니사정도 지금보다 나을 것이고...”

양씨는 지난 3일 자신의 축사에서 숫송아지 한 마리를 얻는 경사가 있었지만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나락농사도 힘들지만 앞으로는 소규모로 한우를 먹이는 농가들도 많이 힘들어질 것 같아요. 브랜드화다 뭐다 해서 대규모 낙농가에 국가의 지원이 집중되고 소농들은 소외되고 있어요. 사료 값은 하루 가 멀다하고 치솟고 있고요.”

귀곡은 예부터 그 쌀의 뛰어난 미질로 이름이 높았다. 고래실 논이라 하여 일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마을 앞뜰에서 생산되는 쌀은 지금도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마을의 주작, 쌀에 대한 걱정은 이 나라 모든 농가의 시름과 다름없이 귀곡에도 깃들어 있다.

“논을 놀릴 수는 없잖아요. 돈이 안돼도 나락 심는 수밖에 없죠. 내년에 정부수매가 없어진다, 어쩐다 하지만 당장 나락농사 지어야 하는 농민이 아니고서야 그 심정을 알겠어요?”

하귀곡 양진태(54)씨다. 올 봄에도 파종을 할 계획이냐는 물음에 ‘돈이 아니라 땅을 보고 농사를 짓는다’는 대답을 들었다. 바보같은 질문을 했구나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아무리 땅이 좋으면 뭐합니까. 폐경, 휴경지가 점점 늘어가는 것이 현실이고, 노는 땅에 씨를 뿌릴 사람들도 없어요. 앞으로 이런 추세는 더 심해 질 것 같고요.” 양진원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에 말대로 ‘지켜 볼 도리’밖에 없는 것일까?

▲그래도 마을 인심은 ‘최고’
다섯 마을이 동서로 흩어져 좀처럼 한 곳에 모이기 힘든 귀곡리.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서양속담이 이 마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최고라고 들 하지만, 이웃간에 화목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 마을에는 서로 헐뜯는 사람도, 불목 하는 사람도 없어요. 비록 마을 간에 거리는 떨어져 있어도, 화목한 것 하나는 정말 자랑할 수 있습니다.”

언제 이장이 됐는지 기억도 가물거린다는 양진홍(55) 이장은 지난달 26일 마을총회에서 다시 한 번 연임이 결정돼 올해로 12년째 귀곡의 눈과 귀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지령에서 소목까지 오랜 세월 주민의 손과 발이 되어 온 그에게 그간의 소회를 들었다.

“자꾸 노령화가 되어가는 마을에서 이장으로 한 일이라고 생각나는 것은 별로 없어요. 단지 하나 스스로 만족하는 부분이 있다면, 각각이 떨어진 마을에 사는 주민 간에 오해나 분쟁이 없도록 늘 윤활유 역할을 해온 정도라고 할까요? 아무튼 우리 마을같이 가족처럼 지내는 마을도 드물겁니다.”

몇 안 되는 주민이지만, 주민들은 그렇게 가족처럼 연결돼 있었다. 혼자 사는 노인들도 그래서 외롭게 느껴지지 않는 듯 했다.

▲손자 장가가는 것 보는 것이 꿈
마을을 나서려는데 회관 앞 ‘큰대문집’에서 연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할머니 혼자 기거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한때 윤택한 살림을 자랑했을 법 한 ‘큰대문집’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이경출(84)할머니다. 상하귀곡에서는 가장 연장자다. 

거친 주름으로 덥힌 손등이 나무토막을 부지런히 아궁이로 밀어 넣고 있다. 인기척에 힐끗 돌아보시는 할머니 얼굴이 참 곱다. “할머니 뭐하세요?"

“낮에 밥을 많이 해서 찬이나 만들어 놓으려고...무에 사탕가루 넣고 삶아 먹을껴” 한참을 지켜봤다. 불을 지피고 무를 썰어 가지런히 담은 할머니가 허리를 펴고 부엌을 나와 툇마루에 앉으신다.

할머니 옆에 자리를 잡고 지내온 시절에 이야기를 들었다. 시집올 때 4령구(네 사람이 드는 가마)타고 들어온 얘기, 전쟁 때 피난을 잘 못 가 생사를 넘나 든 얘기, 도시에 나가 살고 있는 자손들 얘기 등 할머니는 찬찬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귀평리가 한 눈에 들어오는 할머니 집 툇마루에서 귀평 가랫골 뒷산으로 넘어가는 저녁 해가 선명하다  “할머니 소원 있으세요?” “왜? 들어 줄라고?” “그냥 궁금해서요.” “우리 손자 장개가는 것 보는 것이 내 소원이여. 대학까지 나오고 잘생긴 장분데 서른넘게 아직 장가를 못가네. 손자 장가좀 보내 줘.”

빽빽한 인구로 넘치는 대도시의 풍경, 그 껍질 속에 가득 찬 소외와 단절의 상처. 낯선 사람의 모습만 보여도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시골의 관심, 굵게 팬 주름과 기울어진 토담 안에 가득 찬 정(情)의 공동체. 

시골과 도시는 이렇게 다르다. 이 ‘다름’은 우리에게 아무 말 없이 귀곡의 가치를 알려주고 있다. 10년 아니 100년 후에도 귀곡이 변함없어야 하는 필요는 거기에 있었다. 올 봄에는 귀곡마을에 사람의 새싹들이 많이 자라길 기원한다.

개장 4년 맞은 귀곡리 순 우리 콩으로 만든 '고향메주'

하귀곡 입구에서 제일 처음 방문객을 맞는 것이 바로 고향메주다. 지난 2001년 농한기 여성 일손 활용 및 소득증대 방안의 하나로 개장한 농촌여성일손갖기사업장 고향메주는 오늘까지 만 4년 단골고객들에게 우리 전통의 장을 공급하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메주 숙성실에서는 오는 음력 정월 출하를 기다리고 있는 순수 우리 콩 14가마 분량의 메주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소비자들의 밥상에 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 콩으로 전통방식 그대로 만들어요. 된장이며 청국장, 메주 등등 늘 해오던 우리방식 그대로 장을 띄우고 간장을 냅니다.”

옛날부터 어머니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는 전통메주의 제작방법을 그대로를 고수한다는 고향메주 이윤월(53) 대표는 고향메주 맛의 비결을 이렇게 설명한다. “청성 땅에서 나는 순 우리 콩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큰 비결이겠죠. 다만 소비자들에게 이쁘게 보이기 위해 다른 업체들이 쓰는 색소나 방부제를 일체 사용하지 않다보니 처음 고향메주를 접하는 사람들은 간혹 낯설어 하기도 해요. 중요한건 맛이니까요.”

메주 뿐 아니라 된장, 청국장, 간장 등 우리 콩으로 만든 다양한 먹거리들을 만들어 내는 고향메주의 소비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처음 개장을 하면서 TV같은 전국방송에 많이 실렸는데 그때 인연을 맺은 전국의 소비자들이 아직까지도 고향메주를 이용하고 있어요. 고향메주 먹고 나면 다른 메주 먹기가 힘든가 봐요. 또 그분들 주위에 사람들로 소비자들이 확대되고 있고요. "

고향메주 이윤월 대표는 돈에 큰 욕심 안 부리고 말 그대로 ‘일감 갖기’를 보람으로 메주공장을 이끌고 있단다.  이윤월, 전병림, 민순복, 김미숙 등 4명의 주부가 이끄는 고향메주 발전의 냄새가 참 구수하다. 
 주문  011-9840-9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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