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53] 청성면 귀평리
신마을탐방 [153] 청성면 귀평리
오덕재 넘나들던 옛 추억과 따뜻한 수다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5.01.01 00:00
  • 호수 7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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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윷놀이의 즐거움은 할머니 한사람 한사람이 풀어내는 옛추억 더듬기의 재미에 뒷전으로 밀렸다. 귀평 마을회관의 초겨울 풍경.

동지를 하루 앞둔 날씨가 매섭기 그지없다. 매서운 날씨 탓인가? 자동차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정오뉴스도 온통 날씨만큼이나 차가운 소식뿐이다. ‘쌀수입 물량 갑절로 늘어….’, ‘수입쌀 내년부터는 할인점을 통해 식탁위에 오를 것으로….’, ‘속보입니다. 전국의 농민 1만여대의 트럭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해 도심 곳곳서 차량 시위중이며, 진압에 나선 경찰은 상당수의 농민을 강제연행해….’

차창 밖으로 흐르는 능월들의 겨울 풍경에 이유모를 한숨이 나온다. 라디오 뉴스에 빼앗겼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귀평리를 알리는 이정표를 만났다. 19번 국도를 보은방면으로 달리다 보면 귀평리 마을입구를 알리는 돌구조물을 만나게 되는데 본 마을은 이곳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한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청산으로 향하는 이 국도가 본래 귀평리 마을 앞으로 지날 예정이었으나 귀평유림들의 반대로 국도와 마을은 거리를 두게 됐다고 한다. 혹자는 그것으로 마을이 낙후되었다는 말을 하지만, 그 결과를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꽃가마 타고 넘던 오덕재 추억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 작은 언덕을 넘는다. 오른쪽으로 귀곡리 지령마을을 지나고 잠시 후 귀평리 버스 정류장이다. 귀평리는 양촌(양짓말) 14가구, 평촌(평짓말) 10가구, 곤남(골래미)11가구, 추동(가랫골) 5가구 등 총 40가구 80여명의 주민으로 이뤄져 있다.

마을과 마을 사이를 비옥한 논과 밭이 가로지르는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포근함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날씨만 좀 포근했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버스정류장에서 평촌 마을회관까지 신작로를 종종 걸음쳤다.

“윷이요!”

마을회관 입구까지 할머니들 윳노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다들 모이신 모양이다.

“옛날 얘기좀 해주세요.”
“뭐 기억나는게 있어야 해주거나 말거나 하지.”
“또 신문에나서 망신당하는거 아녀?”

무슨소린지 자초지종이 궁금하다.

“20년전 쯤인가 마을에서 단합대회를 갔었는데 머리에 수건 질끈 묶고 오랜만에 신나게 놀았어. 그런데 누가 우리 노는 모습을 사진을 찍어 떡하니 신문에 낸거아녀. 그 일로 동네 어르신들한테 무척 혼이 났지.”

할머니들의 웃음소리에 회관이 떠나갈 것 같다. 기억나는 것이 없다는 것은 괜한 소리였던 모양, 너무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쉴새없이 계속됐다. 그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단연 염순희(77)할머니의 결혼 이야기. 안내 오덕이 고향인 할머니는 일본의 정신대 징용을 피하기 위해 열여덟 되던 해 그녀의 언니와 함께 한 달 사이에 서둘러 결혼을 한다.

“그때 왜놈들이 처녀들을 트럭에 싣고 가는 걸 보고 기겁한 부모님이 언니와 나를 한 달만에 둘 다 시집을 보내버린 거야.”

열여덟 꽃다운 처녀는 족두리를 머리에 쓰고 얼굴도 모르는 신랑을 찾아 꽃가마를 타고 개나리 흐드러진 오덕재를 넘었다.

“가마타고 멀미나면 고개도 못들어.”

꽃가마 타던 추억이 함께 있던 할머니들의 기억을 자극하고 저마다 그 시절을 회상한다.

“아 왜, 새신부가 꽃가마 타고 가다보면 가마가 우지끈 부러지는 일도 많았잖아. 가마 부러지면 어떠켜, 기냥 족두리 쓰고 덜렁덜렁 가마꾼들이랑 걸어가는 거지.”

혼사를 올리려면 당연히 꽃가마를 타던 시절의 이야기로 할머니들은 또 한바탕 박장대소다. 시집온 새색시 염순희 할머니는 당시 열아홉 헌헌장부였던 새신랑 백성기(78)할아버지의 얼굴을 신방 차리고 사흘이 지나서야 처음 봤단다.

회관의 할머니들 모두 꽃다웠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지긋지긋한 세월이었지만 또 그리운 순간들이 아픈 기억 사이사이 책갈피처럼 자리하고 있다. 일제 공출을 피해 꽃가마를 타고 오덕재를 넘던 그 봄날처럼...

◆전쟁이 맺어준 따뜻한 인연
어디 꽃가마 뿐 이겠는가. 할머니들은 어린시절 일제시대를 시작해 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농촌근대화를 통해 오늘 21세기에 이르는 시대를 함께 공유한다. 근대사의 격변기마다 역사가 겪은 격동들은 할머니 개개인에게 개인적인 체험으로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통에 귀평리에 핀 따뜻한 인연 이야기 한토막. 귀평리는 그 지형적인 특징으로 인해 서울 등 경기지역에서 전쟁을 피해 피난을 온 사람들에게 피난지 역할을 했다.

“마을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피난민들에게 사랑채를 내어줬어요. 그 사람들도 손님이라고 그 형편에도 지킬 것은 다 지켰죠.”

피난을 나섰던 주민들 외에 마을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이렇게 피난처로 귀평리를 택한 생면부지의 피난민들과 오랫동안 더부살이를 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세월이 한참을 지났어요. 큰 가방을 둘러맨 할아버지가 어느 날 시아버님을 찾으시데요. 그래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분이 전쟁통에 우리집 사랑채에서 피난살이를 하셨던 서울 분이더군요. 그분이 당시로는 큰 돈이었던 3만원을 감사의 표시로 놓고 가셨어요. 그래서 시아버님이 그 돈으로 라디오도 사고 벽시계도 사고 하셨던 기억이나요.”

한월인(62)씨의 가족과 서울서 온 피난민과의 인연은 그 후로도 이어졌다.

“그리고 한참 후 그 분의 아들이라는 분이 또 저희 가족을 수소문해서 얼마 전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갔어요.”

“그 어르신네가 안방을 비워준 것이 참 고마웠던 게야.”

이야기를 듣던 할머니들이 한마디씩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귀평리의 후덕한 인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마을의 내일, 향우회가 있다
한창 옛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귀평리 향우회 백우현(50)회장과 신두영(39)총무가 회관으로 들어섰다. 겨울바람을 피해 마을사람들이 따뜻한 회관으로 다 모이는 참이다.

“우리 마을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30대 후반에서 50대까지 30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향우회가 마을 대소사를 직접 다 챙깁니다. 다들 의욕이 넘쳐요."

서른하나에 귀농해 고향에서 푸른 꿈을 일구고 있는 향우회 총무 신두영씨는 향우회야 말로 귀평리의 자랑거리라고 힘주어 말한다.

“내년 정월 대보름 행사도 정성껏 준비할 계획입니다. 출향인들이 쉽게 참여 할 수 있도록 대보름 나흘 전인 2월 19일 쥐불놀이와 마을제사 등이 포함된 전통의 축제를 재연할 계획이에요. 한번에 완벽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매년 조금씩 알차게 준비하고 있어요.”

귀평리 향우회 백우현 회장은 이제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대보름행사에 기대가 크다. 04년 처음 귀평리에서 농촌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간 아주대학교 농활대 학생들도 참석하겠다는 소식을 전해왔다고.

뒤늦게 자리를 함께한 신영인(47) 이장도 정월대보름 행사준비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신 이장은 마을광장이 없는 귀평리의 형편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라고 한다.

“우리 마을에 마을광장이 없어요. 여느 마을처럼 마을규모에 맞는 농산물집하장 등 마을공동의 광장이 없다보니 마을에서 행사를 준비하려면 다같이 모일 장소가 마땅치 않아요. 주차공간이 부족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마을광장에 대한 아쉬움은 아직 남아있는 마을 숙원사업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밭 경지정리사업을 마친 것이 벌써 10년도 넘었는데 아직 밭과 연결된 농로포장사업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에요. 그래서 비만 오면 불편한 것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사람 다니기도 힘들다 보니 농기계는 말할 것도 없죠.”

할머니들의 윷노는 소리와 어울린 귀평리 젊은 농군들의 마을 미래에 대한 설계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계속됐다.

“자금의 지원이라는 문제가 있겠지만, 귀평리가 친환경 농업 등 어떤 하나의 주제로 묶여 움직일 수 만 있다면 그 힘은 무궁무진 할겁니다. 외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지리적인 모양새도 그렇거니와 비옥한 토양과 마을의 넓은 뜰은 어디서도 찾기 힘든 천혜의 보물이죠.”

신 이장은 마을의 주요작목인 담배, 인삼, 버섯, 고추, 벼 등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주제로 풍요의 뜰을 하나로 묶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걸림돌을 가능성으로 전환하는 것, 그것은 귀평리 주인들의 몫이다.

능월 농우회 신한중 전 회장도 귀평과 나아가 대안리 12개 자연마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은 확고하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귀평, 귀곡, 안티로 구성된 대안리 12개 자연마을이 머지않아 그 잠재된 가능성을 세상에 펼칠 날이 오리라고 믿습니다.”

◆매봉재 명당에 세워진 철탑
가능성과 현실사이의 거리. 그 거리를 좁히는 시간은 과연 얼마나 오래인 것일까. 귀평리에는 주민들의 눈에 가시 같은 철탑이 하나 있다. 골래미 뒤로 보이는 매봉재, 좌청룡 우백호의 든든한 품으로 마을을 감싸는 매봉재의 혈맥의 가운뎃 자리에 떡하니 박혀있는 그 철탑은 이방인이 보기에도 그 위치가 양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지금도 전력선이 지나고 있는 저 철탑은 일제시대 때 저 자리에 박혔습니다. 마을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철탑을 박을 당시에 마을주민들이 혈자리에는 절대 철 구조물을 세워서는 안된다고 일본인들에게 심하게 항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렇게 오늘날 까지 서있어요.”

주민들의 반대에도 일본인들의 의지대로 마을 혈자리에 서있는 철탑. 그 철탑을 옮기는 시간, 그 시간이면 귀평리를 포함한 대안뜰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은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머지않았다는 느낌을 희망으로 안고 어두운 저녁, 정월대보름 행사 때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따뜻한 마을 귀평리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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