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꿈, 연변을 가다(3) - '충의'의 길을 따라
대륙의 꿈, 연변을 가다(3) - '충의'의 길을 따라
대륙의 꿈, 연변을 가다(마지막)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2004.11.05 00:00
  • 호수 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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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암(오른쪽) 관장이 일송정 비가 세워진 곳에서 박찬웅(왼쪽) 부의장, 강호동(가운데) 부군수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일송정에 올라
연길에서 용정까지는 고속도로로 한 시간 거리에 있다. 길림성 유일의 고속도로라고 하는데 대전-옥천간의 국도 수준이다. 차량통행이 많지 않아서 한적했다. 지금 우리 일행은 선구자들이 가난과 핍박 속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거치를 벌판을 옥토로 일구어 낸 세전 벌에 누렇게 익어가는 벼의 모습을 보며 일송정을 향하고 있다.

세전벌 한가운데로 흐르는 강이 해란강인데 세전벌 너른 농토를 적셔주는 핏줄이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길에 모화산을 지나게 되는데, 온통 배나무 과수원이다. 80여년 전에 최창호씨가 개간지에 배나무를 심어 가꾸기 시작했는데, 사과맛이 나는 배라고 하여 ‘사과배’나무라고 부르며 언 배의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용정시를 3km쯤 지나면 비암산에 이른다. 비암산 주차장에서 보니 화룡시와 용정시가 아름답게 내려다보인다. 마침 9월3일이 용정시 창립 52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기념으로 해란강 경기장을 짓고 준공식겸 축구경기가 이뤄지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운동장에 가득 차 있었다. 일송정은 비암산 절벽위에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청기와를 올려놓은 정자처럼 보여서 일송정이라고 불리워졌단다. 이곳이 독립운동의 기지가 되어 일제로부터 많은 탄압과 핍박을 받아 소나무는 없어지고, 1980년대에 부산시민의 성금으로 정자를 세우고 비를 세워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정자에 오르니 그 옛날 선구자들이 말을 달리던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리는 듯 하여 “일송정 푸른 솔은…”하고 한곡조 뽑을 수 밖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같이 부르는 노래속에 모두가 그 옛날 투사의 모습으로 목청을 돋구니 그 기개가 만주 벌판을 압도하고 있었다.

◆용정학교에서
용정중학교에는 대성중학교의 옛 터가 있고, 복원된 학교에 윤동주, 이상설의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민족정기의 산실인 동흥, 대성, 은진, 영신, 명신, 근화중 등의 6소학교의 존폐 역사와 독립운동사와 연관지어 전시되어 있었다.

만주 땅에서 항일운동사가 농축기록 되어 있으므로 그 수난의 역사를 일일이 기록할 수 없어 용정출신 인사 몇분을 소개하는 것으로 줄이고자 한다. 저항시인 윤동주, 천재문사 송몽규, 아리랑의 제작자 라운규, 해외 밀사로 파견되었던 이상설 선생, 반달의 작가 윤극영 선생, 정일권 총리, 문익환 목사 등이 이 곳 출신이거나 이곳에서 항일활동을 하신 분들이다.

지용선생과 연변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저항시인 윤동주가 지용선생과 같은 동지사 대학 영문학부 후배이며 윤동주 사후 1948년에 발행한 첫 유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서문을 쓴 사람이 정지용이다. 윤동주가 연변에서 가장 아끼고 추앙받는 시인이므로 정지용 또한 연변 동포의 가슴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하겠다.

◆두만강 푸른 물에
도문은 회령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중국의 도시이다. 용정에서 도문으로 가는 길에 개산둔을 지나게 되는데 청나라 봉금령을 어기지 않고 회령지방 조선족들이 자유롭게 농업에 종사할 수 있었던 두만강 가운데 만들어진 사이섬인 간도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곳이 있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던 넓은 만주땅이 간도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일제 침략자들이 만주땅을 유린하고 수탈과 독립투사들을 핍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어이없는 행정구역 명칭이 된 것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강의 크기는 옥천에 흐르고 있는 금강물보다 수량도 적고 강변도 좁아 보였다. 두만강을 따라 한만국경철교가 놓여있는 도문에 닿았다. 국경철교의 망대가 있고, 중국 쪽은 붉은색, 북한 쪽은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강 중심이 국경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철교로 가지 않고 1km 쯤 상류로 올라가 두만강 뗏목을 탈 수 있는 나루터로 갔다. 강 건너 숲 속에는 50m 간격으로 국경초소가 숨겨져 있다고 한다. 중조 국경이라는 표지판 옆에서 사진을 찍고 뗏목을 탔다. 강물은 상류의 펄프공장에서 흘러나온 폐수로 인해 검게 썩어 있어서 민족의 애환이 담긴 낭만의 푸른 물이 아니라 검은 물이었다.

강에는 선을 그을 수가 없는지 물이 흐르는 곳은 모두가 국경선이요 상륙을 중심으로 국경침범을 논하는 것 같다. 내가 탄 뗏목의 사공은 회령쪽 강가 2km까지 뗏목을 저어갔다. 그리고는 강바닥에 손을 넣어 두만강 돌 두개를 주어주며 기념으로 가기고 가란다. 고마운 사공이었다.

도문 앞의 두만강은 강폭으로 보나 수심으로 보나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건널 수 있는 강이었다. 국경수비대의 감시망만 벗어날 수 있다면 쉽게 오갈 수 있는 땅이었다. 북한 병사 한 사람이 군견을 데리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얼어붙은 두만강을 목숨을 걸고 넘나드는 북한 어린이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저 강을 건너 거치를 벌판으로 망명길에 올랐던 옛 님들의 모습이 어른거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수암<향토사료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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