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동이면 조령리 대밭골여울
[정수병과 함께 여울을 건너다] 동이면 조령리 대밭골여울
18년간 돌았던 물방아 흔적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4.10.22 00:00
  • 호수 7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물흐름이 거세지는 곳 대밭골여울. 보이는 돌은 정경용(왼쪽)씨가 운영했던 물레방아 물막이 댐으로 막았던 돌이다. 30년전 막았던 돌은 여울자리를 증명해주는 흔적이 되었다.

한적한 오후, 구름이 잔뜩 끼어 하늘은 가라앉아 있지만 강을 찾아간다는 마음 하나로 가을을 느끼게 한다.  금강을 따라 찾아가는 여울길. 서민들의 애환이 있고, 볏나락을 수확해 건너던 황소걸음이며, 잡곡이며 가축들을 심천장에 팔러 다녔던 그런 길이었다. 이제는 가물가물 기억조차 지워지는 추억의 길이나마 물레방아를 돌렸던 물막이댐 돌이 여울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향토사학자 정수병씨와 함께 간 대밭골여울에는 이미 여울을 안내할 정경용(73·동이면 세산리)씨와 이병찬(79·동이면 조령리)씨가 기다리고 있다"

“길 위쪽으로 대밭골이라고 좁다란 골짜기가 있어. 이 골짜기를 쉰 다랑이골라고도 하는데 계단논이 좁다랗게 쉰 다랑이나 있었댜. 논을 다 합쳐도 서너 마지기밖에는 안 될 걸 아마. 옛날에 새재(조령리)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비오는 날 삿갓쓰고 도롱이 입고 골짝 논에 나갔어. 물꼬를 보고는 재미로 다랑이가 잘 있나 숫자를 세었다나봐. 그런데 아무리 세어봐도 한 개가 모자라. 마흔아홉 다랑이밖에는 없는 거야. 끝내는 할 수 없이 ‘논을 누가 퍼갔겄어?’ 하고는 벗어놨던 도롱이하고 삿갓을 들고 일어섰댜. 그러니까 그 삿갓하고 도롱이 밑에 논 한 다랑이가 있더랴. 그러니 얼마나 작은 논이었겠어. 쉰 다랑이골에 내려오는 전설여.”

전설 중에는 항상 있을 법한 일들이 많으니까. 정경용씨의 전설 얘기가 사실처럼 들린다. 4명의 일행은 한바탕 웃었다.

◆도롱이 벗었더니 논이 있더라는 쉰 다랑이골
여울은 그렇게 주위의 많은 얘깃거리를 끼고 돌돌거리며 흐른다. 대밭골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만 해도 굵기가 가는 조릿대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대밭골은 여울의 하류 쯤에 위치해 있다. 한 100여m쯤 될까?

여울의 상류 쪽으로는 또다른 골짜기, 댁보루골이 있다. 여울의 위와 아래로 골짜기가 하나씩 있어 사람들의 주요 통행로가 되었다.

지금처럼 조령리 새재로 향하는 도로가 금강변을 따라 개설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여울은 댁보루골 넘어 없어진 조령리 절골과 대밭골 넘어 두 가구가 사는 윗새재 마을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여울의 하류쪽 골짜기 이름을 따서 ‘대밭골여울’, 또는 상류쪽 댁보루골의 이름을 따서 ‘댁이여울’이라고 불렸던 여울이 조령리로 향하는 도로의 10여m 아래에 펼쳐져 있다.

금강소수력발전소를 거친 물이 고속도로 옛 금강4교를 거쳐 하폭이 좁아지면서 유수량이 많고 물 흐름이 특히 빠르다. 물살도 세서 사람이 건너기는 어렵다.

◆조령·합금·고당 사람들 심천장 오가던 길
“이쪽 조령리에는 논이 없었어. 그래서 우산리 메쥐골에서 주로 농사를 지었는데 가을이면 벼를 베어 소 등에 올린 질마에 시태바리를 올려서 싣고 여울을 건넜지.” 사람은 볏단 한 짐만을 질 수 있었지만 소 등에는 길이 좋으면 세 짐까지 질 수 있었다.

농토가 있던 우산리 메쥐골과 마을과는 적어도 4∼5km 정도 떨어진 길이라 소를 이용하지 못할 경우 볏단을 지게로 날라야 했다. 정경용씨의 옛 얘기.

“메쥐골에서 볏단을 지고 오면서 쉴 때면 길바닥에다 말리는겨. 그렇게 말리면서 집으로 오다 보면 일 주일 정도 걸리는데 그 동안에 벼가 자동으로 다 말라.” 그렇게 운반한 벼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홀태로 훑었고, 발로 밟는 탈곡기를 이용해 탈곡도 했다. 벌써 50년은 된 얘기란다.

지금도 윗새재에 살고 있는 이병찬씨가 젊을 적 주로 이용했던 여울이 바로 대밭골여울이다. 옥천향교 전교를 맡고 있는 이종하씨의 고향도 바로 윗새재이다. 여울을 건너 대밭골을 넘어서면 바로 마을이었다.

“대밭골여울은 다른 곳보다 여울 깊이가 깊지 않았어. 다른 곳으로 다 건너지 못해도 여기로는 건넜는걸.” 여름 장마철이면 여울을 건너기 위해 수위를 측정(?)하는 바위가 있었다. 까막돌. 지금은 수풀이나 강변 자갈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건너편 우산리 쪽에 까막돌이 보이면 건널 수 있었고, 보이지 않으면 건널 생각을 못했다.

◆물레방아 설치로 여울은 제 모습을 내주고
마을 사람들이 농사일 뿐만 아니라 장에 갈 때도 이 여울은 지름길이었다. 새재에는 밀과 보리가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심천장은 이 곳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장. 여기에 청성면 고당·합금리 사람들도 여울을 두 번 건너면서까지 대밭골여울을 건넜다.

현재 우산리-고당리-합금리로 연결된 금강변 군도 쪽으로도 길이 나 있었지만 빙 돌아오는 길이었기에 여울을 두 번 건너면서도 심천장 가는 지름길인 대밭골여울을 택해 걸어다녔다. “지금처럼 강변으로 난 도로가 없으니까 골짜기를 넘어 이 여울로 가면 적어도 2km 정도는 빨리 갈 수 있었거든.”

대밭골여울은 1958년부터 1959년까지 정경용씨에 의해 한 차례 변화를 겪는다. 정씨가 여울 자리에 내수면 이용허가를 얻어 물레방아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세산리 좋은 논 912평을 92만원 받고 팔아서 보를 막기 시작했어. 동네 사람들이 ‘저 미친 놈’이라고 했지. 보를 막아서 물레방아를 설치하고 나중에는 발전기를 돌려 우산리에 전기까지 공급하려고 했어.”

그렇게 설치했던 물레방아는 정씨에 의해 18년 동안 운영되었다. 그 동안 크고 작은 홍수가 물레방아를 덮쳤어도 정씨가 만들어 놓은 물레방아는 끄덕없이 견뎌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울을 건너지 않아도 물을 막는 댐 위를 건너다닐 수 있게 되었다. 여울은 그렇게 물막이댐의 형태로 변해 지금도 그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군데군데 돌로 막아놓은 흔적을 여울이 타고 넘는 이 구간은 특히 물살이 센 곳으로 변해 있었다.

물레방아 운영했던 정경용씨 - 물레방아 따라 돌던 파란만장한 인생

정경용씨 삶의 젊은 시절은 대밭골여울과 함께였다. 정씨가 지난 1958년부터 동이면 세산리 좋은 논을 팔아 이 곳에 물레방아를 설치하고 18년간 운영을 했고, 대청댐 건설이 시작된 후 보상을 받아 방아를 철거하고 고향 세산으로 돌아왔다. 물레방아를 하면서는 이장까지 봐가면서 좌충우돌 이런 저런 일을 겪었다.

남들이 욕을 하든, 정씨는 당시로는 많은 돈을 투자해 보를 막았고, 정씨의 물레방아에서 찧은 보리쌀은 최고의 품질, 많은 수량을 내는 곳으로 인정받았다. 심천장에 가면 정씨의 물레방아에서 찧은 보리는 돈을 더 받을 정도로 이름을 알렸다. 그래서 자식들을 물레방아해서 대학까지 가르쳤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마을에는 7대 정도의 발동기가 있었으나 결국 정씨의 물레방아 때문에 `발동기'는 맥을 못추었단다. 해마다 겪어야 했던 홍수를 견뎠던 정씨의 물레방아는 철저한 연구와 물에 대한 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찌나 튼튼하게 관리했던지 정씨가 만든 물레방아를 지탱했던 나무 기초와 물길을 돌렸던 돌보가 지금도 현장에 남아 있을 정도.

지금 조령리로 향하는 도로의 원형이 뚫린 것도 정씨가 군에 민원을 제기했고, 특히 일부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공사가 마무리될 즈음에 중장비를 동원, 길뚫기를 추진해 끝내 성사시키기도 했다.

정씨는 수력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려고도 했다. 서울 청계천에서 발전기를 사다가 운반해 놓았으나 고속도로 건설 후 우산리 등에 전기가 들어오는 바람에 꿈은 이루지 못했다.

“보리 18말을 팔아서 죽을 고생을 하며 서울에서 발전기를 사왔는데 전기사업은 못하고 세산리까지 발전기를 가져왔다니까. 결국 어떻게 한 줄 알아? 그 발전기 빨래비누하고 바꿨어.”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