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 [146] 옥천읍 서대2리
신마을탐방 [146] 옥천읍 서대2리
옛 학동들 글 읽는 소리 이어지는 마을
  • 백정현 기자 jh100@okinews.com
  • 승인 2004.10.15 00:00
  • 호수 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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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당골 최고령 여경림(85) 할머니가 밝은 표정으로 콩타작에 열심이다.

민족의 대 명절 추석을 지난 첫 주 월요일, 가을 하늘은 그 깊은 품을 한껏 자랑하며 펼쳐진다. 옥천에서 영동으로 달리는 4번국도 역시 가을 하늘처럼 시원스레 길을 열었다.

옥천읍 서대2리는 국도에서 군남초등학교를 만나 191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서대2리는 포도가 주요 생산품으로 마을의 서당포도작목반회원 스물 두 가구 가운데 시설포도를 재배하는 여섯 가구를 제외하고 대부분 노지포도를 재배하고 있으며, 주요작물인 포도와 함께 사과와 배, 복숭아재배농가와 벼농사를 하고 있는 농가가 있다.

본래 함양 박씨 집성촌인 서대2리는 현재 박씨들과 타 성씨들이 반 정도로 주민을 구성하고 있다. 군남초등학교를 지나 서대2리를 향해 시원하게 뻗은 진입로는 귀현, 귀죽, 귀화를 지나고 동이까지 이른다. 근대화 이전 이 길을 통해 금산에서 보은까지 걸어 다녔다고 하니, 오늘날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그 모습은 변했지만 두 발로 또 네 바퀴로 오랜 시간 딛고 밟아 지나온 시간의 내력이 느껴진다. 마을 진입로 오른쪽으로 수확을 기다리는 황금들녘에 다시 한번 바뀐 계절을 실감하며 마을회관 근처에 차를 세웠다.

▲ 땅콩 껍질을 까고 있는 노부부. 왼쪽이 박경애, 오른쪽이 박희중씨.

“서대리가 아니라 서당골이야!”

‘탁탁탁….’
땅콩껍질 까는 소리다. 두 노부부가 집 앞 마당에서 가을볕을 받으며 땅콩껍질을 까고 있다. 박희중(79)할아버지와 박경애(72)할머니 부부. 동이 청마리가 고향인 할아버지와 대전 유성이 고향인 할머니는 6.25전쟁 중에 부부의 연을 맺고, 20년 전 쯤 이곳으로 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땅콩을 너무 일찍 캐서 덜 영글었어, 벌레들이 자꾸 파대서 일찍 캤는데 별루여.”

할머니가 망치로 힘들여 껍질을 깐 땅콩을 염치없이 입에 넣고 깨물어 보았다. 고소하다.

“이거 볶아야 고소해. 비릿하지?”
“안 볶고 그냥 먹어도 되겠어요. 장에 갖고 가시게요?”
“이까짓 얼마나 된다고. 애들이나 한주먹씩 주고 마는 거지.”

노부부의 마당을 나와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마을회관 바로 길 건너에 사는 박재훈(62)씨가 아들 창현(38)씨와 이제 막 수확한 벼를 가을볕에 말리느라 분주하다. 창현씨는 서당골에서 가장 젊은 농군.

“이 마을에서 처음 수확한 벼여.”

누렇게 속이 꽉 찬 벼 바라보는 아버지와 아들의 표정이 함께 흐뭇해 보인다. 마을회관에서 담소를 나누던 박덕흠(54)이장과 새마을지도자 임현묵(53)씨도 취재 나온 기자를 보고 대화에 합류했다.

“아주 옛날부터 이 마을에는 서당이 많았어. 그래서 서당골이라는 고유의 이름을 갖게 되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옛 어른들이 앞일을 내다 보셨는지, 서당골에 이름그대로 큰 서당인 군남초등학교가 생겼으니 선견지명이라고 해야겠지.”

박재훈씨가 서대2리의 본 이름 서당골을 설명하자 어느새 대화를 듣고 서있던 박재준(80)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한마디 하신다.

“서대2구가 아니고 서당골이라고 불러야지. 서당골이 본 지명이고 더 나아.”

박재준 할아버지 말대로 ‘서당골’이라는 고유한 이름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서대2리(서당골의 ‘서’와 신대리의 ‘대’를 차용해 1910년부터 사용했던 명칭)와는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이 땅의 아름다운 제 이름이다.

“서당골은 장령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 둘도 없는 명당자리라 사람살기 좋은 터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지.”

배움이 깊은 마을이니 이름 높은 효자가 당연히 있을 터. 주민들의 안내로 서당골 박세환효자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 마을의 문화재 박세환 효자문. 올해로 건립 100주기를 맞는다.

100주기 맞는 `박세환 효자문’
마을회관 건너편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잠깐을 걸어 오르니 서당골의 문화재 박세환효자문이 나타난다. 나지막한 동산위에서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효자문을 가까이 살펴보니 문 안 현판에 효자증조봉대부동몽교관함양박세환지려(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咸陽朴世煥之閭)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효행으로 조봉대부동몽교관의 벼슬을 받은 함양박씨 박세환을 기리는 문 이라는 뜻이다. 광무8년, 즉 서기1904년에 새워진 것으로 적혀 있으니 마침 올해로 효자문의 역사가 백년에 이른 것.

효자문의 주인공 박세환은 병으로 앓게 된 아버지의 병구완을 위해 한겨울 밥을 싸들고 석 달 동안 저수지를 전전긍긍해 잉어를 구하여 부친의 병환을 낫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평생을 부모님모시기에 정성을 다한 박세환의 효행은 조정에 알려지고 1904년 고종 14년 효자정문이 서게 된 것이다.

지금의 이 효자문은 6.25때 소실된 것을 다시 건립한 것으로 박세환 효자의 산소는 동이면 적하리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까지 효자문을 관리하던 5대손 박정근씨가 지난 6월 세상을 뜨게 되어 당분간 효자문의 관리는 고 박정근씨의 동생 박효근씨가 맡게 되었다.

올해부터 효자문의 관리를 맡게 된 박효근씨는 매년 10월 14일 효자문에서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올리는 유일한 예식은 올해도 어김없이 진행 되지만 100주년을 기념하는 별도의 행사는 없다고 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100주년이라는 말에 막연한 서운함을 뒤로 하고 다시 마을회관으로 내려왔다.

서당골 마을회관은 지난 해 12월 기존의 낡은 건물을 대신해 주민과 출향인의 정성을 모아 새로 준공한 건물로 집하장으로 쓰는 넒은 마당과 할머니방, 할아버지방 겸 회의실을 갖추고 있어 필요할 때 마다 그 구실을 톡톡히 해낸다고.

마을을 스쳐간 해방전후사
마을회관 앞 그늘에서 여유롭게 장미담배를 태우시는 박재준(80)할아버지와 박영택(71)할아버지. 마을의 옛날이야기가 듣고 싶어 슬그머니 의자를 끌고 옆으로 앉았다.

박재준 할아버지는 젊은 날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을 뻔 했던 이야기와 국군으로 서부전선에서 6.25를 겪었던 이야기를, 박영택 할아버지는 국군과 인민군으로 각각 징집돼 전쟁에 참전해야 했던 자신의 형제들 이야기를 했다.

“6.25전쟁 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았어. 한날 아침에 총을 멘 순경 대 여섯 명이 사람들 이름을 막 부르면서 다니더라고. 조용한 마을에 아침부터 총을 든 순경들이 버글대니까 무서운 생각이 들더구먼. 그래서 내 이름이 불리자 날 찾아온 순경 몰래 슬그머니 도망을 갔지. 그래서 아직 내가 살아있어. 그때 영문모르고 순경들 따라 나선 마을장정 대 여섯 명은 결국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어. 보도연맹이 뭔지도 잘 모르고 도장 찍으래서 좋은 것 인줄 알고 도장 찍었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날 아침에 다 끌려가서 죽었지. 지금생각해보면 그때 잘나고 똑똑했던 사람들 참 많이도 죽었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얼마 뒤 국군에 징집되어 3년간 서부전선에서 생사를 넘나들었던 일로 이어졌다.

“가끔 전쟁영화를 보는데 다 엉터리여. 전쟁은 겪어보지 않고는 아무도 모르는 거여.”
"그럼...다 엉터리지." 이야기를 듣던 박영택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난 큰형이 국군으로 가 전사했어. 작은형은 또 인민군으로 징집돼 여태 생사도 모르고... 그때 난 나이가 열일곱이라 어디도 끌려가지 않고 살았지. 서당골에서 의용군으로 인민군에 징집된 청년들이 내 작은형까지 모두 넷이었어.”

한 마을에서 어떤 청년은 국군으로, 또 어떤 청년은 인민군으로 징집돼 전장에 나간다. 불과 50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 마을회관에서 만난 사람들. 왼쪽부터 박재훈, 박덕흠, 임현묵, 박재준씨

마을진입로 불편, 농로포장 숙원
서당골 주민의 불편사항들도 적지 않다. 군남초 옆 서대-구일간 신도로가 개통되었음에도 4번국도상 기존 도로체계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구도로를 기준으로 운용되는 관계로 보행자들이나 운전자 모두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박관흠(54)이장은 “새로 난 도로는 횡단보도나 신호등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포장도 되지 않은 구도로를 차량과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며 “삼청리 과선교 완공 때 까지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전이라도 주민불편을 해소 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화물차를 운전하는 서당골 주민 박영문(31)씨도 서대-구일간 도로는 차들의 이용이 매우 빈번한 교통사고 위험지역이라며 좌회전 신호를 받고 국도로 진입하기위해 어쩔 수 없이 구도로를 이용할 때 마다 사고위험으로 아찔하다고 한다.

박씨는 특히 군남초 학생들의 등하교 때 마다 안전대책이 없는 마을 진입로 때문에 위험에 노출돼 있다며 하루빨리 관계당국의 대책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4번국도 서대2리 진입로 신호체계와 관련하여 경찰의 관계자는 삼청리 주민들이 현재의 신호를 받고 국도로 진입하기 때문에 삼청리에서 국도로 나오는 새 도로 없이 현재의 횡단보도와 신호등을 변경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 서대2리 약도

그리고 군남초등학교 부근의 안전시설 설치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지난 6월 30일 담당기관인 옥천군에 반사경과 과속방지턱설치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 건설과의 담당자는 안전시설 설치와 관련해 경찰로부터 받은 안전시설 설치요청이 실수로 누락되어 아직 설치를 못했다고 밝히고 빠른 시일 안에 반사경 등 적절한 시설을 설치할 것이라고 했다.

마을진입로 문제 말고도 주민들은 마을 연못으로 통하는 농로의 미 포장구간 완전포장을 가장 큰 숙원사업으로 손꼽았으며, 도시계획구역이 서당골까지 확장돼 마을이 조금 더 발전하길 바란다는 바램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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