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피해 자원봉사 이후 꾸준한 옥천의 소문난 맥가이버 도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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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사는 세상 [118] 따뜻한 손을 가진 일꾼 황응기씨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4.09.10 00:00
  • 호수 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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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의 맥가이버 황응기씨

이 사람 참 된 사람이다. 남을 도와주려는 열정이 넘쳐서 그렇지 악의 하나 없는 사람이다. 지난 3월 폭설 피해 때 오토바이를 단기필마로 혜성(?)처럼 나타나 피해현장을 헤집으며 따뜻한 온정을 내어 준 사람이다. 

작업도구들을 다 챙겨와 자원봉사자들에게 나눠주고, 각 읍면을 돌아다니며 하루도 아닌 열흘 남짓 자원봉사활동을 다녔다. 하루 공사현장에 나가면 일당 10여만 원 이상은 거뜬히 벌 수 있는 능력 있는 작업반장인 황응기(60, 옥천읍 삼양리)씨가 돈벌이를 마다하고, 피해현장에 뛰어든 것은 돕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 그 뿐이었다. 

그로 인해 행자부장관 표창도 받았고, 방송과 신문 등 각종 언론들은 그를 집중 조명했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어떤 명예욕도 아니었다. 

잠시 오해도 했었다. 좋은 일 한 것을 너무 알리려고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와 이야기를 하고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나누며 서로 돕는 세상이 되길 바랄 뿐이다. 

폭설피해는 세월이 지나면서 잊혀졌고, 그의 활동도 묻혀져 갔다. 그러나 그의 활동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예전처럼 꾸준히 손이 필요한 곳에 거침없이 다가섰고, 도움이 필요한 현장에는 그림자처럼 늘 그가 있었다.

봉사활동은 쭈욱 계속된다
경기도 여주시 가남면 심석리에서 태어난 그는 한양중과 한양공고를 나와 바로 군 입대를 했다. 목수인 아버지를 따라 일을 배우다가 뒤늦은 50대에 옥천에 들어온 그는 군북면 환평리에 자리를 잡았다. 2년 남짓 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곳에서도 솔선수범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줘 정이 많이 들었단다. 

얼마 전 한여름 복날에는 개와 닭을 잡아서 추소리 마을회관에서 환평, 추소 주민들과 함께 마을 잔치를 열기도 했다. 이후 옥천읍에 정착해 살며 건축현장에서 일할 때부터 그는 꼬박꼬박 저축하면서 성실하게 살았다. 오토바이와 그 옆 가방에 담긴 수많은 연장도구들, 군인복장에 베레모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그는 때가 덜 타고, 작업할 때 편해 군복을 선호한다지만, 나름대로 은근한 멋을 유지하고 싶어서인 것 같다. 아무튼 그 군복 때문에 황응기씨는 천생연분 뒤늦은 배필을 만났다. 군복 지퍼가 고장 나서 옥천읍내 수선집을 다 돌아다녔지만, 못 고친다길래 마지막에 들른 곳이 바로 옥천종합상가내에 진달래 수선집. 다소곳한 자태에 부지런히 일을 하는 박희분(50)씨가 맘에 쏙 들었던 것이다.

수차례 구애 끝에 그는 맘을 얻어 늦은 결혼을 하게 됐다. 늦었지만 그 만큼 행복해 보였다.  황응기씨가 맘놓고 열심히 자원봉사활동을 하게 된 것도 다 박희분씨가 뒤에서 조용한 응원을 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저씨 돈은 안 벌고 봉사활동만 열심히 다니시는데 괜찮아요?”라고 슬쩍 떠보니 “어려운 사람 도와준다는데, 뭐라고 해요”라며 나직이 대답한다. 우문현답이다. 

박희분씨는 하루도 쉬지 않고 밤늦게까지 열심히 옷 수선을 한다. 마침 옷을 수선하러 온 박향란(77·옥천읍 금구리)씨도 박씨 칭찬에 입이 마른다. 

“난 여기밖에 안 와. 얼마나 깔끔하고 진중하게 잘 하는데.”

황응기씨가 폭설피해복구 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했을 때 도시락을 손수 싸주며 응원을 해줬다는 박희분씨. 부부는 그 성실함으로 닮아 있었다. 황응기씨가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게 된 배경에는 숨은 후원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소박한 꿈
그는 현재 건설현장에서 작업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관여한 건물만 해도 옥천도서관, 문정주공, 장야주공, 노인장애인복지관, 축협 건물 등 옥천의 왠만한 건물은 그의 손길이 닿았다. 그의 성실성으로 인해 찾는 사람이 많아 일거리 걱정은 따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침 7시부터 시작되는 바쁜 건설현장 일에도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어려운 사람들의 벌초 작업을 도와준다. 최근에는 이원면 인지컨트롤스 작업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동안, 이원면내에 어려운 집 5가구를 찾아 새벽부터 무료로 벌초를 해주고, 출근을 했다.  맘먹지 않고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재미로 사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참 기분이 좋아요. 다른 건 필요 없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면 피로가 싹 풀리거든요” 

누구든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달려가서 돕는 다는 것이 그의 생활신조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를 좋아하고 후원해 주는 사람도 많다. 읍내 신진오토바이 사장은 형님으로 모신다며 잘 따르고, 군북면 이백리 동화상회, 한밭식당, 초량순대, 옥천, 이원양조장에서는 술과 음식들을 공짜로 주기도 한단다. 

“고맙죠. 그 분들은 신문에서, 방송에서 저를 봤다며 좋은 일 하는데 어떻게 돈을 받냐고 그냥 공짜로 주세요. 그래서 더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게 되기도 하구요.” 

내년까지는 봉사활동도 봉사활동이지만,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후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단다. 그것은 혼자 살기 어려운 독거노인들이나 결식아동들을 위해 집을 짓고, 머리도 깎아주며 조그마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경치 좋은 시골에 들어가서 어려운 어르신들 모시고 살고 싶어요. 그 분들 위해서 예쁜 집도 지어주고, 머리도 단정하게 깎아주고요. 서로 존중하며 사람답게 사는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많은 장비를 실을 수 있도록 만들고, 곳곳에 돌아다니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 도와주기도 하고요.” 

사실 그의 인생사는 참 드라마틱하고 우여곡절이 많았다. 아직은 공개할 것이 못된다며 기사화하는 것을 만류했지만, 그는 아픈 과거를 딛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어려웠던 삶, 일부러 떼어내려 하지도 않았고, 잊으려 하지도 않았다. 자기 생활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면서, 힘차게 남은 삶을 일구고 있었다.

‘어려움에 닥치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라. 그러면 그는 홀연히 나타날 것이다.’ 
그는 옥천에 몇 안 되는 ‘따뜻한 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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