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꿈을 이뤄 행복합니다''
“오랜 꿈을 이뤄 행복합니다''
[내고향 옥천] 군서 동산리 출신 대전 국제양복점 대표 제19회 한국맞춤양복기술 경연대회 대상 한상희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4.09.08 00:00
  • 호수 7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군서 동산리 출신 대전 국제양복점 대표 한상희씨

‘꿈’. 그것은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 한 줄기 빛이었고, 희망이었다. ‘첫 마음’. 그것을 온전히 간직한 채 그는 꾸준히 정진해 갔다. 거친 세월의 파도가 자신을 무너뜨리려 해도, 작은 성취가 오만의 함정에 빠뜨리려 해도 그는 그 ‘처음의 꿈’을 놓지 않았다.

쉰 다섯의 나이, 40년 가까운 양복쟁이 생활에 그가 평범한 동네 양복점 주인으로 남아있지 않았던 것은 그를 끊임없이 채찍질했던 바로 그 꿈이었다. 양복 만들기에서 만큼은 세계 최고, 전국 최고가 되고 싶다는 꿈 말이다. 그는 지난 8월25일 열린 제19회 한국맞춤양복기술경연대회에서 대상을 타서 그 꿈을 이뤘다. 여러 번 도전한 끝에 거둔 값진 성공이었다.

한국이 거의 독식하다시피해서 세계대회가 없어진 마당에 그는 엄연한 우리나라 최고, 세계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것이다. 그를 만났다. 대전시내 국제양복점에서 조용히 장인정신의 향을 내뿜고 있는 그를 만나고 싶었다.

“향수병에 걸렸어요”

한상희(55), 군서초 40회 졸업. 군서면 동산리 출신이다. 한상희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어려운 환경 속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자랐다. 바로 손윗 누이와 11살이나 차이났을 정도로 늦동이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으로 가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야학을 했다. 16살 때부터 지금 운영하고 있는 국제양복점에 들어가 양복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 당시 양복 재단사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가장 인기있는 직종이었다고 했다. 거리를 지나다가 쇼윈도에 걸려진 멋진 양복을 보고 무작정 찾아 들어갔다는 그는 당시 국제양복점을 운영하는 신현국 사장의 배려로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제양복점 사원으로 처음 양복쟁이 생활을 시작한 그가, 맞춤양복 1인자의 대열에 오른 지금, 국제양복점을 운영하는 사장자리에 있다는 것은 참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가 초심을 잃지 않고 달려왔다는 것, 꿈을 이루기 위해 지난한 세월을 겪으면서 과거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고향에 좀더 가까이 있고 싶어 했다는 것이 함유돼 있었다.

그는 향수병에 걸려 다시 고향 가까이에 둥지를 틀었다. 국제양복점에서 시작한 양복일은 서울 종로 5가, 종로 3가, 맞춤양복으로 명성이 자자한 서울 명동, 소공동까지 진출하면서 일을 배웠지만, 고향생각이 간절했다고 했다.

그는 악착같이 배우고, 성실하게 일했다. 명동 유유양복점에서 괴산출신 성재열씨의 배려로 취직을 했지만, 실력이 못하다는 이유로 괄세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다.

원래 그의 꿈은 세계양복기능인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지만, 군대를 다녀왔을 때는 이미 한국의 11연패 독식으로 세계양복기능인 대회가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에서 실력을 키워 대구, 울산, 부산 등지에서도 그를 스카웃 해갈 정도로 차근차근 명성을 쌓았다. 그러던 중 그는 97년에 대전으로 내려온다. 그의 말 그대로 옮기자면 ‘향수병에 걸렸다’고 했다.

맞춤양복, 인생의 승부를 건 장인정신

“단순히 만든 양복을 파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손님과의 대화 속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끌어내고, 손님에게 맞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며 오랜 시간동안 절충과정을 거쳐요. 취향 뿐 아니라 성품까지 담아낸다고 보면 됩니다. 맞춤 양복은 전 세계에서 자신에게 맞는 단 하나뿐인 양복이잖습니까? 그래서 손님에 대한 모든 것을 양복에 담으려 합니다.”

체형과 성품, 몸과 마음이 조화롭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장인정신의 비결이었다. 맞춤양복은 기성복과 달리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고스란히 살려낼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복식문화를 조성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체득한 양복 디자인 기술을 늘 후학들에게 나눠가지려 한다는 점에서 다른 장인들과 또 다르다.

“제가 알고 있는 기술 다 가르쳐줘서 후배들은 더 창조적인 맞춤양복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맞춤양복 기술을 가르쳐 줘 그들에게 새 희망을 심어주고 싶다는 그의 새로운 꿈은 그가 이루려 했던 맞춤양복의 1인자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어머니’라는 말을 던지자,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이 났던지 눈시울을 붉혔던 그에게 고향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어머니’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