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11월 1일은 129주년 동학 재기포 명령일
[기고]11월 1일은 129주년 동학 재기포 명령일
1894년 9월 18일(음력) 청산현 소사동(소서리)에서,
최시형 교주 “전국 동학교인 무장봉기(재기포) 하라!
전국에 명령 내려, 전국 동학군 보은·영동 집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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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0.27 00:50
  • 호수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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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표 옥천군향토전시관 관장
전순표 옥천군향토전시관 관장

11월 1일(음력 9월 18일)은 최시형 동학 교주께서 전국 동학교도들에게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무장 봉기하라’는 「동학 재기포」 명령 129주년이 되는 역사적으로 의의가 큰 날이다.
1894년 9월 18일(음력) 최시형(崔時亨) 교주를 비롯한 동학군 수뇌부는 충청도 청산현 한곡리 문바위골에 바로 인접한 청산현 남면 소사동(옥천군 청성면 소서리)에 모여서 1894년 9월 18일(음력) 무장봉기인 “재기포 명령(再起包 命令)”을 전국 각지 동학 접주들에게 하달했다. 

■ 전봉준 군사행동과 충청도 도인 탄압에 - 무장봉기 강경노선 선회

그 당시 강경파인 서장옥 제자 전봉준(全琫準) 접주를 비롯한 손화중, 김개남 등 남접동학군의 독자적 군사행동에 큰 자극을 받아 최시형 교주가 전국 동학교인들에게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특히 충청지역 관리들이 동학교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탄압이 극심해지자, 각 지역 접주와 동학교도가 대항하며 최시형 교주에게 무장봉기를 촉구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최시형 교주를 비롯한 동학교 지도부는 온건노선에서 강경노선으로 선회하여 전국에 ‘동학교도는 무장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라’라는 기포령을 내려 전국의 동학군은 일제히 전국 각지에서 무장투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전국에 「재기포령(再起包領)」이 내려지자 이에 동학도들은 즉각 호응하여 충청도와 강원도, 경상도 각 군현의 동학 접주들은 그 지역 군현의 읍내를 점거, 접수하는 무장봉기에 나섰다. 그와 더불어 죽창과 농기구, 화승총으로 무장한 경기, 강원, 충북지역 동학군들이 지역을 출발하여 크고 작은 관군과의 전투를 치르며 남하(南下)하여 대도소(大都所)가 있던 충북 보은군 장안(長安) 장내리로 속속 집결하며 동학군의 진용을 갖춰 나갔다.

경기도 각 지방의 동학군은 충북 중부지역으로 남하하고 강원도와 충북 북부지역 농민군도 충북 중부지역을 거쳐 오면서 합류하여 거대한 군단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충북 보은 장안의 장내리 일대는 수만 명의 동학군이 집결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어 식수나 잠자리 등이 턱없이 부족하여 (북접)동학군을 수용 할 수 없었다.

이에 지휘부는 몰려오는 전국의 동학군을 보은(報恩) 장안에 남쪽 방면으로 청산현을 거쳐 수십 리 떨어진 충청도 최남단 산악지대로 관군의 활동이 뜸한 영동현(永同縣)과 황간현(黃澗縣)에 분산하여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특별히 충청도 동남권인 보은, 옥천, 영동은 동학 교세가 커서 대접주가 2명씩에 이르는 등 동학도의 위세가 대단한 지역이다. 영동과 황간은 충청도 최남단으로 경상, 전라, 충청 3도가 접한 교통요지에 위치하고 1천m에 달하는 소백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첩첩산중으로 북접동학군 수만 명을 각 마을에 분산하여 수용하도록 하였다

전국에서 영동과 황간에 집결한 동학군단은 관군과 일본군과의 전투에 대비하는 한편 전투에 필요한 동학도들의 군량미 등 군수품과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전국에 걸쳐있는 330개 각 군현 동학 조직망을 통해 전쟁물자 확보에 심혈을 기울인다.

■ 동학군 영동포 부대, 옥천포 부대 합류, 북접동학군, 손병희 지휘 논산·공주로 진격

최시형 교주는 충북 남부지역에 머물며 북접농민군 총지휘권을 통령 손병희(孫秉熙)에게 주어 충청도 남부 교통요지 논산에서 전봉준 대장의 남접 농민군과 합세하여 수도 한양(漢陽)으로 북상할 계획이었다. 손병희 통령이 지휘하는 (북접)동학군 군 편제는 각 부대를 포(包-꾸러미)라 하고 오색기로 각 포를 분간토록 해서 선봉대는 정경수 포로 청색기, 좌익은 이용구 포는 흑색기로 우익인 이종훈 포는 백색기, 후군을 담당하는 전규석 포는 적색 깃발을 달고 손병희의 총지휘부 중군은 황색기를 휘날리며 동학군을 지휘했다.

충청도 동남지역인 영동·황간·옥천·청산에 집결했던 (북접)동학군 주력군은 추수기가 지난 1894년 10월 23일(음력)에 영동(永同)과 황간(黃澗)을 출발하여 전봉준의 전라도 (남접)동학군과 합세하는 논산(論山) 대본영을 향해 출정하여 서울로 통하는 충청대로(경부선 길)를 따라 북상하며 옥천에서 옥천포 부대와 합류하여 충남 논산과 공주 효포 방면으로 진격했다.

 충북남부의 영동,황간,옥천,보은에 집결했던 북접동학군 주력이 논산으로 빠져 나가자, 옥천,청산,영동,황간의 관군과 민보군 그리고 일본군이 지역에 남아 있던 잔여 동학군 세력을 소탕하며 북접 근거지를 차례로 순회하며 파괴해 나갔다. 보은포 김자선 부대는 북상하다 청원 초정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대패하여 상주 산간 지역으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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