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이 행복한 옥천을 꿈꿔봅니다''
“주민들이 행복한 옥천을 꿈꿔봅니다''
[내고향 옥천] 안내면 용촌리 출신 충남도청 도로교통과장 전병욱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4.08.27 00:00
  • 호수 7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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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면 용촌리 출신 충남도청 도로교통과장 전병욱씨

그는 좀 달랐다. 고향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어떤 낭만적인 환상을 그려내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주의적 관점(자신만을 아는 ‘이기적’이라는 말과는 다르다)에서 고향을 바라봤다.

애향심을 갖는 것도 좋고, 동창회를 구성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것도 좋지만, 그는 단체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한다는 생각 자체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는 말은 지극히 비논리적인 말이라고 공박하며, 개개인이 행복하지 않은데, 어찌 단체나 나라가 행복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결코 조직의 일이 개인에게 부담을 안겨주거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사적인 이익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해할 수는 없지만, 그 역으로도 통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마지막에는 개인과 단체가 서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모색해 보아야 한다고 말을 맺었지만, 그가 조심스럽게 내지른 말에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고향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해 그는 다른 사람과 좀 달랐다. 당혹스럽긴 했지만,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가 있었다.

용촌 산골에서 밤티를 넘나들며

충남도청 전병욱(47) 도로교통과장이다. 안내면 용촌리 밤티 출신. 용촌초등학교, 안내중학교, 대전공전 마지막 졸업생. 어떤 이들은 졸업기수를 또렷하게 기억하며 고향과 학교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 사람은 좀 예외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기억할 수 없단다. 그래도 어렵사리 물어 고향이야기 한 자락을 꺼내들게 한다.

“용촌리에 밤티, 용수말, 새터말, 솔미 4개 마을이 있었는데, 저는 밤티에 살았어요. 4개 마을 한 가운데에 학교가 있어서 학교 종치는 소리 듣고 학교에 갈 정도로 가까웠어요. 그 때는 한 180명 정도 됐었나요. 참 아이들끼리 재미나게 놀았는데…. 그런데 중학교가 문제였어요. 용촌에서 안내 인포리까지는 걸어서 1시간 30분 정도 됐거든요. 어릴 때는 체구도 왜소했는데, 큰 가방 들고 학교가다 입학하고서 3일동안 앓아 누웠어요. 그 이후로 학교 한 번도 안 빠지고 다녀서 정근상인가를 받았어요.”

3형제 중 장남, 어머니는 봇짐장수를 했고, 아버지는 아픈 몸을 이끌고 농사를 짓곤 했단다. 당시 놀거리도 마땅치 않아 공부에 취미를 붙였다. 대전공전을 졸업하고 충북도청 당시 4급(현재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1년 반 정도 다니다가 한양대 토목공학과에 편입해서 졸업한다. 그 때가 82년도,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그는 대학 졸업하고 포항제철에 2년 정도 근무하다가 86년도에 행정고시에 합격해 88년 5월 서천군 건설과장으로 두 번째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도 기반조성 공영개발사업단, 공무원 교육원, 건설정책과, 도시계획계장을 거치면서 2001년에는 미국 오레곤대학에 도시계획 관련분야를 연구하러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다시 귀국해서 맡은 직책이 현재 맡고 있는 도로교통과장이다.

주민 각자의 행복지수가 높아져야

“「지역이 잘 되면 내가 행복해질 것이다」는 막연한 전체주의적 생각이 아직도 우리 머리에 담겨져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어찌 보면 실체가 없고 애매모호한 말이에요. 지역이 잘되는 것이 어떻게 해야 잘 되는 건지 모호하고요. 보통 사람들은 통상 공장이 많이 들어오고 경제가 발전되는 것이 지역이 잘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것도 개념 규정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고요. ‘지역이 잘 되면 과연 내가 행복한가?’라는 물음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국민소득 4천 달러를 외쳤는데, 현재는 2만 달러가 목표라고 하지 않습니까? 생활소득이 나아졌다고 해서 과연 행복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패쇄적이고 배타적인 옥천보다는 열린 옥천을 강조했다. 

“시골에는 아직 따사로운 정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잘못 발현되면 참견과 구속이 될 수 있거든요. 공동체 속에 개인의 삶을 인정하는 것,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을일에 협조 안한다고, 옥천의 일에 무관심하다고 그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좀 더 크게 그들을 포용하고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개개인의 사적인 삶을 그대로 보호해 줄 줄도 알아야 하고요.”

그가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단체나 조직에 의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없어야 겠다는 것. 개인의 ‘밀실’과 공동체의 ‘광장’이 조화로운 공존을 바라는 것이 그가 꿈꾸는 고향의 모습이었다. 그의 말은 ‘단체나 조직에 소속된 개인 말고, 그냥 순수한 나 자신은 누구인가?’라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속 깊은 질문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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