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늘 저와 함께 했습니다''
``고향은 늘 저와 함께 했습니다''
[내고향 옥천] 이원면 백지리 출신 백두철강대표·재경옥천산악회장 이상의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4.08.06 00:00
  • 호수 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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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면 백지리 출신 이상의씨

누구라도 살아가면서 정점을 향해 열정적으로 치닫다가도 벽에 부딪쳐 절망감이 스며드는 암울한 시점이 있다. 다시 바꿔놓을 수 없는 현실 때문에 고통받고, 힘든 시기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네 일상사의 공통된 부분이 아닐까.

하지만, 그 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태도에서 그 사람의 내성이 더 견고해지거나 아니면 쉽게 허물어질 수 있다. 자신이 겪어야 할 몫으로 생각한다면, 문제해결은 쉬워진다. 어려운 시기의 버팀목들은 사람들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힘을 준다.

그것은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향’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마력에는 비길 것이 못 된다. 고향 사람, 고향 친구, 고향 산하, 고향 농산물 등 ‘고향’이 붙는 어휘들은 생채기가 난 몸과 마음을 보듬어주고 새 살을 돋게 한다.

이상의(61·백두철강 대표)씨에게 ‘고향’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는 백두철강 대표로 다시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97년 11월, 잘나가던 건설업체인 우송, 동아, 극동 건설이 연쇄 부도를 맞으면서 철강자재를 공급했던 자신의 회사도 부도를 피할 수 없는 위기에 몰렸다. 95∼96년도에 가장 우수한 철강판매업체로 꼽히는 등 단물을 맛봤기에 그 위기는 더 크게 느껴졌다.

자신도 9억여원의 부도를 맞아 쫓겨 다닐 위기에 몰렸지만, 결국 서울의 아끼는 한옥집을 팔아 일부를 갚고, 나머지는 차차 갚아나갔다. 그 당시 심정을 그는 회고한다.

“물론 저도 부도를 내고 도망 다닐 수야 있었지만, 우리와 연관된 또 다른 업체의 부도도 막아야 하겠다는 책임감도 있었고, 가족들에게 부도를 내서 쫓겨난 기업인이라는 이름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먹칠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순간적으로 들었구요.”

그런 그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업체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지금은 직원이 얼마 안되는 단촐한 회사지만, 다시 포항강판의 제일 우수 판매 대리점으로 우뚝 서길 바라며, 한 걸음씩 떼어놓고 있다.

아! 그리운 옛날이여

그는 지난 6월26일부터 7월5일까지 환갑을 맞이해 부인과 함께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 서부를 여행했다. 그 동안 고생시킨 부인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고, 되돌아 온 삶을 반추해보는 의미도 있었다. 웅장한 자연미를 뽐내는 그랜드캐년과 화려한 도시 문명을 자랑하는 라스베가스도 둘러보고 감탄을 했지만, 몸에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포근한 고향과 어찌 비교하랴.

이원면 백지리에서 태어나 6살때 바로 이웃마을인 영동군 심천면 장동리로 이사했다던 그. 옥천과 영동의 경계지점에 산 그는 초등학교는 영동, 중학교는 옥천으로 다녔다. 심천초 14회, 이원중 12회. 둘 다 소홀히 할 수 없는 고향이기에 얼마 전에는 심천초 총동창회 주관기수 회장도 맡았고, 재경이원향우회 부회장을 맡으며 고향사랑에도 활발히 나서고 있다.

재경 옥천산악회 회장을 맡은 것도 고향사람과 교류의 장을 만들면서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기 위함이다.

그의 집은 초등학교 입학 전 이원면 백지리에서 심천면 장동리로 이사한다. 아마 그 일대에서는 가장 이름난 부자로 일꾼도 3명이나 부리고, 왕골과 미나리 꽝을 대량 생산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는 비만 오면 금강 물이 불어 배를 못 타고 철교 위로 걸어 다녔다. 철교 위를 걸을 때 기차가 지나갈라치면 간이 콩알만 해졌단다.

초등학교, 중학교가 거의 20리 길이 넘어서 참 많이 걸어다녔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다리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튼튼하다고. 지금도 가만히 있으면 고향의 풍광이 저절로 그려진단다. 원동리 금강변에는 하얀 백사장이 널려 있었고, 미루나무가 있었고, 여울에는 물반, 고기반일 정도로 물고기가 참 많았단다.

이원중을 졸업하고, 한밭상고를 다닐 적에는 김천행 통근열차 통학생 부반장을 했던 기억도 털어놓았다. 고등학교 때 체육관에서 권투를 6개월 동안 배워 쌈 깨나 했던 그였다. 그 때 반장은 옥천공고 역도부에 있던 친구였단다. 그 때 통근 열차가 김천행, 천안행, 이리행 세 개가 있었는데, 세 기차를 타는 통학생들끼리 알력이 심했다고.

그는 이제 10년 후에 고향에 다시 내려가고 싶다고 했다. 작고 아담한 시골집을 지어 여울에서 물고기 잡고 농사지으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면서 말이다. 고향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그가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큰 바위처럼 그를 지켜주면서 말이다.

옥천산악회 회원 명단

오병욱(한서진흥 대표), 김소선(흥사단 이사장), 곽명섭(은성약국), 신철(대승지질 대표), 이상의(백두철강 대표), 김병일(동일인더스트리 대표), 이대훈(청운산업 대표), 김홍헌(변호사), 이명석(백산OPC 감사), 연명호(법무사), 이정훈(세웅프랜트 대표), 손기익(신한은시스템 대표), 김정헌(플라스틱조합 상무), 권중우(TBI 부사장), 조규훈(통영세무서장), 한진섭(세원기계 대표), 서준원(국회정책연구위원), 송재성(보건복지부 차관), 곽봉호(코리아 온라인 이사), 김재관(대 충청 대표), 이상제(청일산기), 김학철(국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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