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에 인생사 실어 당기다
활에 인생사 실어 당기다
함께사는 세상 [116] 옥천 국궁의 주춧돌 김재수씨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4.07.30 00:00
  • 호수 7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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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에 국궁을 전파시킨 김재수씨

유별나게 치장해 무거운 양궁과 달리 우리 활인 국궁은 그렇게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알아 온 활의 이미지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 친숙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양궁이야 우리나라 대표선수들이 올림픽 금메달도 따고, 빌헬름 텔과 로빈 훗 등으로 이미 명성이 자자하지만, 국궁이야 어디 그런가? 활을 잘 쏘는 동쪽의 오랑캐라 해서 ‘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지만, 그냥 그렇게 알고 있을 뿐, 선수가 아닌 다음에야 활을 쏜다는 것은 한낱 사치스런 취미로 간주하는 게 우리네 일반적인 정서(?)다. 

그런데, 그 활이 한 사람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소중한 인생이었다. 그는 30년이 훌쩍 넘은 공력으로 활 속에서 인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옥천에서 열리는 백제 성왕기 국궁대회도, 관성정과 청산정도, 그리고 여러 대회에서 좋은 성적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적어도 옥천에서 국궁이 자리 잡는데 선지자적인 구실을 했다. 김재수(52·옥천읍 금구리)씨다. 

옥천읍내 프로방스 사거리 충북과학대 쪽 ‘금옥비디오 가게 아저씨’하면 무릎을 딱 치며 ‘바로! 그 사람’하고 연상을 할지 모르겠다. 마음씨 푸근한 비디오가게 주인인 김재수씨는 바로 관성정(군서면 월전리의 국궁장, 사두 김학진)의 사범이기도 하다. 비디오 가게를 하는 그의 모습이 평범한 일상이라면, 국궁에서 활 쏘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의 비범한 일상이었다. 그는 ‘평범’과 ‘비범’사이에서 균형을 잘 유지하면서 즐거운 일탈을 즐겼다. 아마 그가 우리 활에서 ‘삶의 순리’를 나름대로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그는 관성정에서 활을 당겼다.

장애인일 줄도 몰랐소
활과 화살은 가볍지만 활시위를 당기는 것은 그리 녹록치가 않다.  ‘전추태산 후악호미’(쥠손은 태산을 밀 듯 묵묵히 밀며, 각지손은 호랑이 꼬리처럼 날렵하게 뒤로 뺀다) 궁수는 숨을 고르며 사수 위에 올라선다. 활시위는 천천히 당겨졌고, 화살 하나가 진지하게 허공을 갈랐다. ‘관중이오!’ 탁하는 둔탁한 소리에 명중함을 직감한다. 

화살은 장장 145m의 허공을 2∼3초 사이로 여행을 한다. 모든 동작은 간단하고 쉬워보였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동작인지는 활을 잡아본 사람만이 안다. 사진을 찍으려고, 당긴 채로 잠깐 멈추라고 했더니 그 동작이 오래가지 못한다. 온 몸의 순환이 한 곳에 집중되며, 그 순환은 기가 터지는 그 찰나에 힘을 발휘한다. 영겁을 꿈꾸는 화살은 찰나의 활시위에 몸을 맡기며 유유히 날아가 과녁을 맞춘다. 그것은 간단히 팔만 움직이는 운동이 아닌 전신운동인 것이다. 그가 5개의 화살을 쏜 후 숨을 골랐다. 한결 눈이 맑아지고 개운해 보였다.

국궁과의 인연
어렸을 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다. 옥천읍 금구리가 고향인 옥천토박이. 3남2녀 중 장남이다. 삼양초(21회), 옥천중(18회)을 졸업하고, 바로 청주 북문로 3가의 어느 금은방의 종업원으로 취직한다. 그 때가 1970년도다. 그는 학창시절 운동을 참 좋아했다. 교내 체육대회가 열리면 턱걸이, 물구나무서서 걷기, 탁구, 평행봉 종목의 우승은 언제나 그의 차지였다. 그는 듣기에 따라서 놀라운(?) 고백을 했다. 

36살 되던 해인 1988년도까지 그는 자신이 장애인이란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운동도 열심히 했고, 열정적으로 학창시절을 보낸 것 같았다. 주위 친구들도 그가 약간 몸이 불편한 정도일 뿐 특별히 장애인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또한 콤플렉스를 갖지 않고 자신감 있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

차별을 두며 자꾸 정상인과 분리를 하려는 요즘 시대에는 옛날에서 꼭 배울 것들이다. 아무튼 그는 88년 서울에서 열린 장애인 올림픽 출전 제안을 듣고, ‘아! 내가 장애인이구나’하는 생각을 비로소 하기 시작했단다. 그는 소아마비로 장애4급이다.

초등학교를 늦게 들어가서 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에 19살, 청주 금은방에 취직을 했다. 혼자 자취생활을 한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합기도 도장을 다녔다. 다리가 불편한 그에게 합기도가 잘 맞을 리 없었다.

열심히 운동하고 일하는 그를 지켜본 건너편 낚시가게 주인이 그를 청주 우암정으로 데려간다. 거기서 그는 국궁을 처음 접하고서 ‘바로 이거구나!’라는 느낌이 왔단다.

72년 6월에는 서울 화학정에서 열리는 대회에 첫 출전하고, 73년 전국체전에 충북대표로 출전하게 된다. 그러고서 그는 76년에 다시 고향인 옥천으로 내려와 ‘금옥당’이라는 시계포를 차린다. 그러면서 옥천에 국궁을 전파시킨다. 

“처음엔 집 앞에서 주살만 내다가 양궁과녁만하게 만들어 자전거에 싣고 다니면서 하천 옆에서 연습을 했습니다. 자갈밭을 모래밭으로 만들려면 며칠이 걸려야 하는데, 비만 오면 다시 자갈밭이 되어 고생만 하다 대전 대덕정에 가서 신세를 지곤 했지요. 그러면서 박효근 문화원장님과 목재소를 경영하시던 정두현 사장님과 시내 외곽주변을 수없이 다녔지만, 활터를 만들 만한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국궁과 그 외 이야기들
1987년 옥천고에서 양궁을 하던 학생 1명을 가르쳐 도민체전에 처녀출전시키고, 1987년 11월8일에 장진(사두)씨와 남정현(부사두)씨, 김재수(총무)씨로 관성정을 창립한다. 그리고 이듬해 88년에 도민체전에 참가 5위의 성적을 거둔다. 옥천에서 시작한 그는 영동과 보은에 국궁을 전파하는 산파구실도 한다.

90년 5월에는 옥천조폐창의 이현만씨가 찾아와 지도를 해서 옥조정이 도민체전에 참가, 단체전 2위, 김재수씨는 개인전 2위를 차지했다. 그야말로 옥천 국궁의 중흥기를 맞이 한 것이다. 그리고, 92년 옥각리 하천부지를 임대받아 활터로 쓰다가 93년 4월 남곡리 목사리로 옮긴 후, 94년도에 현재의 활터인 군서면 월전리로 새 활터를 지을 수 있게 됐다.  현재 6대 김학진 사두가 취임하기까지 김재수씨는 줄곧 사범을 맡아 청산정 창립, 옥천상고 국궁동호회 창립, 관성정이 상위 성적을 유지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옥천에서 국궁을 살리다
 ‘국궁을 하면 뭐가 좋습니까?’ 물었다.  “심폐기능이 좋아지고, 우리 몸 전체의 혈액순환을 잘 되게 해서 감기 한번 안 걸리게 하지요. 우리 활은 일본, 몽고 활보다 작고 명중률이 가장 높아요. 양궁이 단지 퉁긴다면, 국궁은 ‘기’를 모아 쏘는 거에요. 힘으로 쏘려면 백해무익하지요.” 

국궁에 대해 말하자면, 하루를 날 잡아도 얘기할 사람이다. 그만큼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이 있고, 국궁을 통해서 만난 사람에 대한 애정 또한 그에 못지않다. 그는 관성정 창립 이외에 옥천군 장애인협회 창립, 옥천음반비디오협회 창립 등에도 큰 구실을 했다. 

그와 옥천의 국궁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봤다. 백제의 성왕이 전사한 전적지가 옥천에 있는 만큼 활쏘고, 칼쓰고, 말달리는 무인의 기상을 되살려 성왕을 해마다 위로해주는 게 어떻겠냐고. 옛날 무과급제 시험을 되살려 단순히 이벤트성 보다는 하나의 멋진 축제로 승화시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즐거워했다.

국궁을 단지 자신만의 것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권해주고 싶은 ‘기분좋은 욕심’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가 싶었다. 오늘도 그는 관성정에서 활을 당긴다. 모든 부질없는 인생사를 화살에 실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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