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면 망월리] 이웃 어려움 함께 나누는 인정많은 곳
[청성면 망월리] 이웃 어려움 함께 나누는 인정많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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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3.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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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월리 전경

누구에게나 과거가 있듯이 좀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도 있는 법. 청성면 망월리에서는 노름이 성행했고 주민들이 소유하고 있던 땅은 다른 마을로 넘겨졌다.

그래서 옛부터 가난했던 마을, 더욱 가난에 찌든 모양으로 기가막힌 생활을 하고 있던 차에 그 어떤 계기에 의해 주민들은 노름에서 손을 떼었고 잃었던 땅을 한뙈기씩 되찾게 되었다. 

주민들의 땅을 되찾게 한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다름아닌 담배농사. 한때 72호 중 60가구가 잎담배 경작에 참여했을 정도로 잎담배는 망월리에 있어서 귀중한 소득작목이었다. 물론 담배농사 자체가 그리 수지맞는 농사는 아니었지만 주민들에게는 목돈을 만져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려운 가운데 10년을 버텨오면서 1천4백만원이라는 마을기금을 모을 수도 있었다. 주민들이 악착같이 일하고 모아 마을을 일군 결과였다. 그후로 주민 수가 많이 감소하지는 않았으나 노동력의 노령화로 인해 담배경작인 수는 절반 수준인 32호로 줄었다.  어쩔수 없는 세월의 변화라 해도 함께 북돋아주며 잘 살겠다고 노력한 결과인지 면내에서도 그리 아쉽지 않은 살림살이를 꾸리는 마을로 변모한 것만은 사실이다. 가구수나 인구수에 있어서도 면내에서는 몇번째 가지 않는 큰 마을이다.

최성종 이장의 말대로 군내 주민들에게 지명조차 낯이 익지 않지만 사는 것만큼은 '택택한' 그런 마을이었다. 그런 사정을 반영하고 있음인지 마을의 집들이 크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깨끗하게 포장된 마을진입로며 안길에다 개량된 농촌주택이 마을의 이미지를 바꿔준다. 적어도 청성면내의 시골동네일 것이라는.

담배 이외에 재배하고 있는 농작물이라야 고추, 참깨 등 일반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마을이 기가막히게 가난했던 마을에서 풍요로운 마을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 앞서 말한 주민들의 노력과 함께 이웃의 어려움을 그냥 두지 않는 풍요로운 마음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4~5년 전인가 당시 6반 반장을 맡고 있던 배상렬씨가 팔이 부러져 추수를 못할 지경에 이르자 마을주민들이 모두 나서 품앗이 해 가을일을 무사히 마쳤던 것을 주민들은 아직도 긍지로 생각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이르면 230년된 느티나무 보호수가 방문자를 반긴다. 느티나무 옆으로 돌 하나하나를 쌓아올린 서낭당이 있고 주민들은 이곳에서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산제를 올린다.  마을 입구에 서있는 큰 나무들이 잎이 무성할 때면 잎에 가려 마을전경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지금도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는 느티나무에는 한가지 얘깃거리가 전해온다.

이른 봄, 잎이 피어날 때 쯤이면 주민들은 느티나무를 관심있게 살핀다. 잎이 전체 나무에서 고르게 피면 풍년이요, 띄엄 띄엄 올라오면 흉년이라는 얘기다. 이 마을 어른들이라면 한해도 틀린적이 없었노라고 애써 강조하는데 93년 올해도 잎이 고르게 나더란다.  현실적으로 조생종이 별로 많지 않아 별 피해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주민들은 이 느티나무의 영험을 믿고 싶어 한다.

면내에서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마을중의 하나로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보은군 삼승면 원남리와 인접해 있다. 사실 청산면은 생활권을 끌만한 유인력이 없는 상태에서 산계리 쪽은 청산생활권, 오구니재를 넘어선 지역, 특히 망월리를 비롯해서 신기.두릉리는 원남생활권으로 양분되어 있다.  면내 경제력이 그만큼 약하다보니 일어난 현상이기도 하기에 망월리로 전화를 하려면 보은지역번호를 눌러야 한다.

인접지역에 시내통화료가 적용되기 이전만 해도 이장을 비롯한 마을일을 보는 주민들이 통화료를 상대적으로 많이 내기도 했으나 원남 생활권인 관계로 오히려 청성면의 다른 주민들보다 보은쪽에 교분있는 사람들이 많아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 것이 현실이다. 

망월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작은개천을 사이에 두고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원남중학교가 위치해 자칫하면 서로 지역이 뒤바뀌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도 한다. 아직은 젊은이가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어 모든 마을일을 꾸려나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궂은 일이라면 모두 맡아하고 있다.

옥천전씨가 많이 살았던 이곳은 15가구 정도가 옥천전씨이며 특별히 많은 가구를 이루는 성씨는 없다.  마을 뒤로 해발 569m의 관모봉이 마을을 싸안고 있는 가운데 6공화국 말기 선거중립을 보장하기 위해 구성된 중립내각에서 내무부장관직을 수행했던 백광현 변호사가 매년 명절때면 마을에 들러 이따금씩 마을기금 등을 희사한다. 백 변호사 자신이 이곳에서 한때 거주했었고 부모님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김인호 노인회장의 아들인 김진수 검사가 수원지검에, 김현수씨가 서울에 거주하면서 고향발전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양대 조동식 교수, 서행남(서울거주), 최성재씨, 구임철(서울거주)씨 등도 망월리를 고향으로 하는 출향인이다.  건축한지 20년이 넘은 경로당 및 마을회관 재건립이 앞으로 남은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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