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각신리] 옥천읍의 오지, 대청댐 건설후 농경지 1/3이상 수몰
[옥천읍 각신리] 옥천읍의 오지, 대청댐 건설후 농경지 1/3이상 수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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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3.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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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읍 각신리

가구수 28가구, 주민등록상 인구 102명은 옥천읍 각신리의 현주소이다. 옥천읍치고는 안남면에서 편입된 오대리를 제외하고 가장 적은 규모. 당연히 옥천읍의 오지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거기다 옥천읍 지역에선 드물게 대청댐으로 인한 수몰지역이다.

좋은 논은 거의 침수당하고 2모작이 안되는 논, 골짜기 땅만 남았다.  전체 농토의 약 1/3가량이 수몰선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빈촌이라고도 하는 이 땅은 해마다 수몰선 안쪽의 농경지를 부쳐 먹으며 수자원공사에 도지를 낸다. 세율은 약 1천여평의 땅에 5만원 정도.

세월에 묻히듯 조용한 가운데 있는 듯 없는 듯 옥천읍과 군북면의 경계 한 귀퉁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 각신리이다.  옥천읍 옥각리 마을을 지나 한층 넓어진 서화천의 제방을 따라 오른쪽에 마을은 자리잡고 있다. 무심코 지나다가는 자칫 마을이 없는지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마을은 그렇게 조용하다. 다만 한가지 마을앞 서화천 건너에 수백년을 지켜온 이지당이 마을 입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본래 이지당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은 이름일 뿐 중봉 조헌 선생은 이지당이라고 불리우기 이전에 이미 각신서당(覺新書堂)이란 현판을 친히 쓰셨다.  그때만 해도 지금으로부터 400여년전이니 각신서당이란 명칭이 '각신동'이란 마을명칭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와는 반대로 각신서당이 있었기 때문에 '각신리'라는 마을명칭이 유래되었다는 설명이 있지만 정황을 살펴볼 때 앞의 설명이 더욱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유래를 보면 '각신동'이라 불리웠던 각신리는 이미 수백년 전에 자연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옥각리가 '옥곤이'와 '각신리'의 첫글자를 따서 만든 명칭임을 되새긴다면 이젠 분명 각신리는 옥각리에 딸려붙은 작은 한귀퉁이일 수만은 없다. 그렇지만 옛부터 각신리가 큰 마을을 형성했던 것은 아니다. 

마을의 고령노인 중 한사람인 백정운(84) 할머니의 얘기를 들어본다.  "각신리에 시집와서 살기 시작한 지 72년 되었어. 그때는 우리 마을에 7집 살았지. 나머지는 모두 그 다음에 이사를 온 거여"  결국 마을의 형성초기에 살았던 주민들은 거의 떠나고 나중에 이주해온 주민들이 대부분이기에 특별히 집성촌을 이루는 성씨는 없다. 현재로선 옥천전씨가 4가구를 비롯, 각기 다른 성씨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각신리가 또한번 변화를 겪은 것은 대청댐이 건설될 무렵. 전체 농경지의 1/3가량이 수몰선 안에 편입되어 골짜기 골짜기를 다니며 농사를 지으려니 자연히 농사짓기가 힘들다. 그나마 트랙터를 보유하고 있는 전길동 새마을지도자가 아니면 많은 논이 묵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70살이 넘은 영세민이 8가구에 이른다. 마을의 영세성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수치이기도 하거니와 영세민은 아니지만 노인인구의 수는 이보다 당연히 더 많다.

지난 92년에 이어 올해도 초교에 입학하는 어린이가 없었을 정도로 사람이 부족한 이 마을은 척박하고 모자란 농사거리를 보충하기 위해 한우를 사육하고 있다. 현재 마을에서 사육하고 있는 한우수는 90여두. 마을에 거주하는 전체주민들 수와 거의 맞먹는다. 

옛부터 담배농사를 많이 지었으나 지금은 노령화 및 노동력 부족으로 단 한집도 없으며, 벼농사 위주의 수도작이 대부분. 주민들중 전준하씨는 가장 젊은 사람으로 배추와 수박 등 특수작물을 재배하는 등 4천여평의 드넓은 하우스를 갖고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마을 젊은이로 인정받고 있다.

마을로서는 하수종말처리장 시설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가축분뇨 등 축산 폐수를 자비를 들여 정화조를 시설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군이나 읍 등에서 정책적으로 공동정화조를 설치해줄 것을 숙원으로 제시하고 있다. 

올해 옥각리로 통하는 1km에 달하는 농로포장사업을 시작한 것 외에 이미 포장한 지 10여년이 지나 곳곳이 패인 마을안길 포장사업이 숙원으로 대두되고 있고 대청호 주변마을이라는 어디나 겪고 있는 안개 피해도 무시 못할 피해이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특히 교사들이 많다. 죽향초에서 근무하다 교감으로 승진 음성으로 자리를 옮긴 전영이씨를 비롯해 손평연씨, 김신마씨, 김유홍씨, 유춘식씨 등이 이곳 출신으로 교편을 잡고 있다. 

출향인 유흥식씨는 마을에 가스렌지 등 음식물을 만드는 기구를 기증해 주민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으며, 대전에 거주하는 전근하씨도 이 마을 출신이다. 80년 대청댐 건설과 함께 왜소화된 각신리는 비록 서로 품앗이하는 옛전통은 찾아볼 수 없으나 화목한 삶을 지향하는 단란한 마을로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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