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면 거포리] 지나는 사람 누구든 술한잔 나누는 인심좋은 마을
[청성면 거포리] 지나는 사람 누구든 술한잔 나누는 인심좋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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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6.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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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포리 전경

거포리(巨浦里)가 현재의 마을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14년 행정구역 조정때부터였다. 이전에는 청산현 서면 황음리에 속해 있던 마을로 구음리와 거포리가 함께 포함되어 있었으며 1739년의 기록에는 1백35호, 1890년에는 1백45호가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청산현에 속해 있다가 옥천군으로 편된 것도 1914년의 일. 거포리라고 한 것은 거흠(巨欠)과 포전(浦田) 두 마을을 합해서였다. 거흠의 '거'자와 포전의 '포'자가 조합되어 거포리가 된 것인데 지명에서 나타나듯 마을 면적이 청성면내에서는 산계리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크다.

마을은 4개 자연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거흠과 윗포전, 아랫포전, 동관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마을 지명에 포전(浦田)이란 바닷가 지명이 특히 눈에 끌린다. 포전이란 말그대로 갯벌이 있는 물가의 밭이란 뜻인데 옛부터 '개밭골'이란 자연지명으로 이 마을이 불리워져 왔던 때문인 듯하다.

대발골 이외에 마을 주위에 대나무가 많다 하여 주민들 사이에선 '대밭골'이란 지명도 얘기되고 있는데 이는 포전이란 지명과 맞지 않는 까닭에 유래를 아는데는 도움이 안될 것 같다.  아마도 포전이란 지명은 대안리나 장연리 쪽에서 발원한 보청천 지류가 화성리를 거쳐 거포.무회리를 통해 금강으로 흘러가는데 마을이 지류가 휘돌아 가는 대로 물을 바라보고 형성되어 있는데 유래가 있을 것이란 추정이다.

이곳이 보청천 지류의 상류이기 때문에 비가 많이 와서 제방으로 물이 넘쳐도 하루만 지나면 평상시의 냇물 형태를 찾는다는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마을 지명과 관련해 자연마을의 하나인 동광(銅鑛)은 일제 침략기 이후에 인위적인 광산 채굴로 인해 새로 생긴 지명이다.  이 지명은 1930년대 일본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동을 캐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됨으로써 유래되었다.

제련소까지 설치해 제법 큰 규모로 하던 때에는 40∼50명의 광부들이 이곳에서 일을 했는데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후 동 채굴은 1973년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이와 함께 '쇠푼재'라 불리웠던 지점에서도 동 채굴이 이루어지는 등 거포리 전체적으로 동이 생산되었다. 쇠푼재 근처의 '쇠기밭'이란 지명을 가진 밭에서는 지금도 철분을 함유한 듯한 벌건 물이 든 자갈들이 많이 보여 이 마을이 광산지대 임을 증명해준다.

마을은 강릉유씨, 양천허씨와 더불어 본이 확실치 않은 이씨 문중이 터를 잡아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강릉유씨의 경우 문위공 할아버지가 터를 잡은 이후 15대까지 이 마을에서 내려왔으니 4백50여년은 넘는 셈이다. 지금도 거흠 13호, 상포(윗포전) 10호, 아랫포전(하포) 25호, 동광 10호 등 58호, 1백69명의 인구 중 13호가 강릉유씨로 구성되어 있으며 함께 마을을 이루었던 이씨는 모두 떠나고 양천허씨는 2여호 남았다. 

현재 마을에 많이 거주하는 성씨로는 거흠의 경주김씨 10여호, 파주염씨 10여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거흠, 상·하포 마을의 경우 마을이 산을 등지고 내를 앞으로 해 남향, 또는 남동향으로 잘 들어 앉았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주위가 산으로 막혀 있는 가운데 천혜의 요새와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거포리.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은 물론 최근 3∼4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은 앞산을 넘어 산계리 면소재지로 통하는 쌀가재(미가성)를 넘어다녔다.  3∼4km에 달하는 평균 1시간 남짓의 거리를 걸어 보리를 찌러 다녔다. 지금은 시내버스의 운행으로 이 길은 쓰이지 않아 가시덤불만 우거졌다. 또한 앞산 높은 봉우리에 있는 속칭 '약물탕구렁'은 옛부터 주민들이 아들을 낳게 해달라며 정성을 드렸던 샘이었다.

정월 대보름이면 정성을 드리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그 샘에 지금은 올라갈 엄두를 못내지만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 만큼은 여전할 것이라는게 주민들의 회고다.  마을주민의 노령화로 인해 특수작물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게 큰 문제점으로 부각되어 있다. 그나마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10여명의 젊은이들은 직장생활은 주로 하고 있어서 특수작물 재배를 이들에게 맡길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주로 벼농사나 고추 등 일반적인 밭농사에 의존하기 때문에 농협에서는 부채없는 마을로 통한다. 주민들은 특수작물 재배 등 큰 자금이 소요되는 일이 없기 때문인지, 부채가 없다고 해서 다른 마을보다 생활이 나은 편은 아니라고 말한다.  동광에 거주하는 박은순(53)씨는 시부모와 시동생을 잘 보살피는 요부로 알려져 있으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거흠의 구자대씨의 삶 또한 주민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

구자대씨는 특히 지난달 15일 대안리 유종식씨 부부가 지병으로 인해 음성 꽃동네를 들어가자 유치원생인 이들 부부의 막내를 맡아 키우기로 해 주위의 칭송을 듣고 있다.  사는 것은 보잘 것 없지만 들에서 일을 하다가도 지나가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술 한 잔을 나눠야 마음이 후련한 인심 좋은 마을의 한 전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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