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성면 산계3리] 밥은 굶어도 자녀 교육열은 으뜸
[청성면 산계3리] 밥은 굶어도 자녀 교육열은 으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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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3.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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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계3리 전경

'부지런한 마을/교육열이 엄청나게 높은 마을/장수하는 마을'  이상은 청성면 산계3리를 상징적으로 표현해도 좋을만큼 알맞은 마을묘사이다. 마을에서 직접 뽑은 열무며 도라지.시금치.상추에다 엿기름까지 일년 열두달 청산장날이면 이들 억척 아주머니들은 어김없이 나타난다.

산계3리 32가구 중 1/3 정도인 10여가구가 청산장에 한달이면 여섯번씩 장꾼으로 나선다. 그렇다고 특별한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다.

 밭 한뙈기에서 몇차례씩 수확을 거두는 비닐하우스 재배도 아니고 채소밭이 별도로 있지도 않다. 그저 터널재배가 가장 발전된 재배방법일 뿐. 밭고랑이나 어디나 씨뿌릴 공간만 있으면 수확해 장으로 낸다.

홍수출하와 상품성 하락을 우려, 파종시기를 조절하는 이들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청산장날 하루 전인 1일과 6일은 마을 고샅 곳곳에서 채소등을 다듬는 손길이 무척이나 바쁘다.  수십년 전부터 이어온 이들의 부지런함은 마을에 잔돈푼이 떨어지지 않게 했고 억척스런 교육열을 뒷받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큰 수입을 벌어들이는 것은 아니죠. 다만 별다른 특수작물이 없는 이 마을에서 대학을 두세명씩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런 억척 때문이었던 걸로 봐요."

김연호 이장이 마을의 부지런함과 높은 교육열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현재 대학에 다니거나 휴학하고 군대에 가있는 수를 대충 헤아려도 족히 10명은 넘는다는 얘기다. 대학갈 실력만 있고 가겠다고만 하면 뒷바라지를 했다는 이 마을 주민들의 교육열은 이렇기에 전국 어느 도시에 못지 않다.

요즘은 노인가구만 남아 있는 마을이 많아 왠만하면 장수마을이라는 평은 받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산계3리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지난 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이 마을의 유권자는 84~85명에 달했다. 이중 정부로부터 노인승차권을 받는 65세 이상 노인수는 26명.  32가구니 거의 한가구에 1명꼴로 65세 이상의 노인이 있는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80세 이상 노인수도 7명에 달한다. 65세 이상 노인들 가운데 약 27%가 80세 이상의 연령이다.

산계3리는 계하와 아니미 두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계하에는 24가구, 아니미에는 8가구가 산다. 뚜렷히 한데 모여 사는 성씨는 없으나 금릉김씨가 7가구가 거주하고 아니미는 안씨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라 전해진다.  아직 벼농사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밭농사로는 고추와 깨가 많다. 한때 청성농협에서 시범적으로 재배했던 더덕재배에 참여한 농가가 있었으나 수입더덕의 범람과 가격폭락으로 이미 지나간 얘기가 되어 버렸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90년 농촌지도소에서 기술지도로 시작한 새 사육이 그것. 당시 7농가가 새 사육사업에 참여했으나 기술부족 등의 이유로 현재는 단 1가구만이 남은 상태가 되었다.  청성면에 근무하는 김창렬씨가 단 1가구 남은 새 사육농가로 김씨는 현재 약 250쌍에 이르는 새를 사육 아직 투자할만큼의 결실은 못거두었으나 그동안의 기술축적으로 좋은 결실을 거두리라는 주위의 전망이다.

두번의 특산물 생산에 실패한 경험을 안고 있는 산계3리이지만 주민들은 그리 낭패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마침 공사가 진행중인 산계2리 포도시험장의 입주가 주민들을 고무시키는 한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그래서 올해는 두가구가 포도재배를 처음 시작했다. 포도시험장에서 우수한 품종이 개발되면 먼저 재배할 수 있으리란 기대도 갖고 있다. 다만 청성면 다른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담배 경작농가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일부 주민들 가운데에서는 판로가 안정적인 담배재배를 하겠다는 주민들도 나타나고 있다.

이 마을 역시 큰 숙원을 몇가지 가지고 있다. 그 한가지가 아니미까지의 진입로 포장. 장마철인 요즘 몇 안되는 아니미 가구원은 물론 70이 넘은 노인들까지 농로보수에 나서고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올해 고개부분 130m가 포장되었으나 아직도 400여m가 비포장 상태로 손질을 기다리고 있다.  계하에도 숙원이 있다. 마을의 가운데를 흐르는 개울의 석축이 40여년이 지난 지금 금이 가는 등 노후화로 인한 붕괴우려가 나타나 보수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 

거동을 못하는 83세의 시어머니와 팔순의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김명순씨의 효행이 마을에 이름나 있는 가운데 아니미 서월귀씨는 정옥순.하길 두 남매를 어릴적부터 친손자처럼 키워와 주위의 얘깃거리가 된 지 오래다.  김성년(청산 충북중기)씨는 마을입구에 이정표를 세워 마을 이미지를 크게 높여준 것을 비롯, 이종면.김동로.이은자씨 등이 이곳에서 배출된 교사들이 각지에서 2세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보청천이 옛 선사유적지이며 천변에서 출토된 유물이 선사인들의 살다간 흔적을 말해주듯 이곳은 선사시대부터 인간들의 발길이 닿는 곳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백제의 접경지로서 수많은 애환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은 마을 뒷편의 저점산성이 마을에 이어질 듯 닿아 있으며 언젠가 그 옛날 홍수때에 가물가물 한 곳만 남아 있었다는 가물재와 도간재 등이 말없이 마을의 유래를 웅변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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