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면 용촌리] 중봉 조헌 선생이 살던 흔적 남아 있어
[안내면 용촌리] 중봉 조헌 선생이 살던 흔적 남아 있어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2.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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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면 용촌리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에 용이 하늘로 솟은 못이 있다하여 용소말이라고 하다가 중봉 선생께서 용같이 훌륭한 인재가 많이 나는 곳이 되라고 붙여진 이름 용촌(龍村).

어쩌면 중봉 선생 그 자신이 용촌마을의 용이라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렇듯 400여년전 중봉 선생의 혼을 마을 구석구석 찾아볼 수 있는 용촌마을은 국난 극복의 의병정신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마을이다.보은군 회남면 노송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용촌 마을은 숙원사업 해결에 한이 맺힌 탓인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단합된 모습이 넘쳐 흐른다.

전체 61가구가 신대, 용수, 도래밤티, 송항 마을 등 4개 자연마을에 흩어져 살면서 좀더 나은 조건을 지닌 마을로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  이 마을은 해마다 가을이면 추모제가 열리는 중봉 조헌 선생의 발길이 흔적으로 있는 곳으로 옛 집터와 옛 후율당 터, 중봉 선생이 마셨다는 샘터와 천기를 보며 놀았다는 유상지석 등이 모여 있어 마을 자체가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주민들의 단합된 힘으로 결실을 맺은 도율-용촌간 포장군도를 따라 한서린(?) 용촌고개를 넘으면 고개 바로 아래에 이 마을 교육의 산실 안내초 용촌분교가 위치해 있고 그 오른쪽으로 용수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용촌분교의 정문을 지나 용수마을 입구에는 조헌 선생이 천문을 보았던 자리라 해서 후배 학자들이 세웠다는 유상지석을 찾을 수 있다.

중봉의 숨결을 처음으로 느끼는 이 비는 옛부터 마을 사람들이 숭앙의 대상으로 삼던 중봉 유적으로 기우제를 지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마을의 큰일이나 마을 각 가정의 작은 일, 가령 군대를 가는 젊은이들조차 마을을 떠나기에 앞서 술 한잔 부어놓고 인사를 치르는 것이 순서로 되었다.  이 비를 떠나 도래밤티 마을로 올라서면 진입로 중간쯤에 그 옛날 중봉 선생이 마셨던 샘이라는 `샘터'가 자리해 대를 이어 얘기가 전해내려오고 있으며 중봉 집터가 이 마을 박병기(57)씨에 의해 소개된다.

이 샘터는 장마이거나 가뭄이거나를 막론하고 수량이 일정할 뿐만 아니라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차가워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의 식수원으로 이용된 곳. 지금은 무심코 흐르는 세월에 따라 잡풀만 무성한 채 이를 보존했으면 하는 마을 주민들의 안타까움만 사고 있다.  마을의 맨 위쪽에 위치한 중봉 집터엔 고추가 자라고 중봉 선생이 넘어다녔다는 오솔길을 따라 `서당골'이라고 불리는 옛 후율당 터를 찾았다.

지금은 모두 유휴지로 남아 있으나 산 날망쯤에 완만한 경사와 함께 탁트인 조망이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이곳에서 공부한다면 저절로 시상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아무튼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중봉 유적은 용촌리 곳곳에 후손들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는 가운데 거의 방치 상태로 있어 주민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용촌고개가 군도로 승격되어 확포장 되기까지는 숱한 애환과 절망이 주민들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다.

1960년 용촌분교가 개교할 당시 용촌리까지 차가 들어오지 못해 보은군으로 돌아 인근 회남면 노송리에 내려진 모래.시멘트 등 건축자재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짐 한짐 날라 학교를 건축한 한 서린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곳 주민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용촌 고갯길을 뚫으려는 노력은 어느 곳보다 절절했고 끈질겼다.  용촌군도 추진위원회(위원장 김진묵)를 구성, 각계에 건의, 진정하기를 십수년. 드디어 그 결실이 맺어져 91년 1월 군도로 승격했고 이제 용촌까지는 확포장이 끝났다. 앞으로 남은 문제는 답양.용촌 갈림길에서 끊긴 포장을 용수 마을 신대 마을을 거쳐 노송리까지 잇는 사업.

주민들의 열화와 같은 소망을 안고 이 사업은 추진 되었지만 그 덕분에 마을 내부의 새마을사업은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자체분석이다.  도로여건 때문인지 용촌리에는 이렇다 할 소득작목이 없다. 다만 7농가에서 잎담배를 재배, 그나마 열악한 소득구조를 메꿔주고 있으며 이밖에 영지버섯재배 1가구, 표고버섯재배 1가구에 새마을지도자인 조연씨의 잠업이 눈에 드러난다.

조연씨는 군내에서도 큰 규모로 누에를 치고 있는데 20장 정도를 사육해 연간 봄.가을로 1천2백만원까지 소득을 올리고 있다. 92년 작황이 좋지 않아 소득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한다는 조씨는 역시 인력부족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서도 마을 유일의 잠업농가이자 군내의 대규모 잠업농가로서 잠업을 지켜가겠노라 의지를 보이고 있다.  중봉 조헌 선생이 웅지를 편 용촌이기에 마을 형성도 그만큼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은 자명한 일.

뚜렷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지는 않으나 안동김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등의 문중이 가장 먼저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건진료소가 위치한 자리도 토지주인 윤석기씨의 희사와 부녀회 기금으로 마련했을 정도로 마을 일을 위한 협동, 단결심이 높다.  마을의 모든 주민이 도로개통에 신경을 쓰느라 기타 주민복지는 낙후되어 경로당이나 마을회관이 없어 안타까움을 사고 있는데 통학생이나 주민들을 위한 시내버스의 1~2회 증회 운행도 현실적으로 큰 숙원이다.

이곳 출신으로는 91년 안남초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박병준씨가 현재 대전에 거주하고 있으며, 옥천읍에 근무하는 추복성씨와 안승태(대전에서 경찰관 생활)씨가 마을을 알리고 있다.  용촌도로를 위해 전주민이 나서 풍물을 쳐가며 기금을 마련했던 마을. 도로의 완공과 함께 덜된 부분에 대한 숙원까지 떠안고 있는 마을이지만 더 나은 소득을 위해 오늘도 부심하고 있는 용촌리 주민들은 제17회 중봉충렬제를 맞아 중봉의 숨결이 더욱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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