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북면 석호리] 명월암과 청풍정이 어울어졌던 고향
[군북면 석호리] 명월암과 청풍정이 어울어졌던 고향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3.1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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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북면 석호리

적어도 대청댐이 건설될 당시 호반 관광지를 꿈꾸었던 주민들의 기대치는 매우 높았다. 아름다운 금강연변에 꾸며진 천혜의 관광자원이 있었고 그 기대로 인해 한때 외지사람들에 의한 투기붐도 일었다. 그러나 그것 뿐이였다. 비옥한 옥답은 모두 대청호수에 수몰되고 지을 땅이 없어진 주민들은 도시의 막노동꾼으로 날품팔이꾼으로 떠나갔다.

당시 조그만 땅뙈기나마 가졌던 사람들의 고충은 그나마 덜했다. 남의 문중 시사답이나 남의 땅을 빌려 소작짓고 있었던 반 이상의 마을주민들은 보상 한푼 못받고 생활의 수단이 없어진 마을을 떠나야 했다.

그리하여 50호 가까이 되던 석결은 20호 남짓으로, 32호까지 살던 도호리는 15호로 절반이 줄었고, 90호가 거주하던 큰마을인 용호리는 현재 주민등록상 8가구밖에 안남아 이젠 마을조차 없어져버리는 상황을 맞았다. 본래 군북면 석호리와 그 주변은 경관이 빼어나 옛부터 꼽아온 `군북8경'중 세곳이나 포함되어 있다.

길이 2km, 너비 200m 넓은 잔디밭까지 갖춰진 호수로 낚시꾼들에게 각광을 받았다는 `용호소'가 4경이요, 김옥균과 기생 명월이의 애틋한 전설과 함께 옥천이 청풍명월의 본고장임을 암시하는 청풍정이 있는 `명월암'이 5경, 옛 군북초 앞에서 본 금강의 일출은 `석호리 일출'이라 하여 7경으로 꼽았다. 이들 세가지 절경중 현재로선 명월암이 남아 있을뿐 나머지는 물에 잠겨 주민들에게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수백년 묵은 흑색 이무기와 황색 이무기가 한쌍을 이루어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용호소는 옛부터 군내에서 대표적으로 기우제를 지내온 곳으로, 기우제 장면은 현재 거주하는 주민들에게서 뚜렷이 들을 수 있다. 옥천군수가 가뭄이 들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던 것은 물론 주민들에게도 신성시되던 곳이다. 한해가 시작되는 시점이면 당시는 안내면이었던 용호리 주민들과 석호리 주민들이 줄다리기를 벌였다. 이기는 마을은 그해에 가뭄이 안들고 물걱정 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전해오기 때문이었다.

또 가뭄이 들면 주민들은 용호소에 가서 키로 물을 떠서 까불렀다. 소위 `날궂이' 의식을 통해 비가 오기를 기원했던 것. 마을로서는 비옥한 양지의 농경지가 있던 옛 군북초 터 주변이 수몰로 인해 물에 잠기자 석호리 일출도 볼 수 없게 되었고, 군북초는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그나마 명월암이 옛 군북8경의 명성을 이어주고 있는 한편 조선말에 무너진 청풍정을 복원하여 이곳을 유원지화 해주길 주민들은 희망하고 있다.

"이곳은 사는 모습이 수몰안된 곳과는 영 달라요. 밭이 많아서 밭농사를 많이 지을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그만 다랭이 논에 모내기만 마치면 그것만 쳐다보고 살 정도니까" 한 주민의 말대로 석호리 주민들은 별다른 소득원이 없다. 석결에 2명, 용호리 1명, 도호리에 1명 등 4명이 어로허가권을 갖고 있을뿐 나머지는 대부분 1정보에도 크게 못미치는 논농사에 매달려 그냥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비옥한 농경지의 수몰이 가져온 결과이다. 이러한 수치는 주민들의 입에서 단번에 확인된다. 석결에 과수원이라고는 복숭아 재배농가 한농가밖에 없으며 그나마 밭이 있는 편인 도호리에는 잎담배 재배농가가 두 세가구 있을 정도이다. 대신 수몰후 경작하지 못하는 휴.폐경지는 엄청나다. 골짜기 골짜기 마다에 또는 물건너에 있기 때문에 소도 못들어가 포기하는 농토가 어림잡아 수만평에 이른다.

마을에 몇척의 농선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주민층이 노인들로 이루어져 있어 소는 고사하고 사람조차 들어가기 힘든 상황. "50대 연령층도 이젠 없다시피한 거지. 그네들은 말하자면 마을에서 어린애 취급을 당하는겨" 하는 말속에 모든 것이 함축된다. 이렇듯 적은 농경지로 인해 주민들의 반 정도는 쌀을 사먹을 도리밖에 없다.

교통편이 안좋은 곳인만큼 몇안되지만 학생들의 통학문제가 가장 큰 어려움. 특히 여학생을 둔 가정에서는 항상 노심초사한다. 그래서 몇몇은 그 없는 살림속에서도 옥천으로 나와 두집 살림을 해야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석호리에는 창녕조씨 문중이 가장 먼저 찾아들었다. 그뒤를 경주김씨가 10대째 살고 있는 이 터전은 그러나 임야나 대지 등이 대부분 외지인 소유로 되어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대청호 관광개발에 기대를 건 외지인들의 투기바람이 한바탕 불었던 것. 어렵게 생을 영위하고 있는 이곳 사람들이지만 인시만은 그대로여서 위안을 삼게 해준다. 이평-추소리간 교량건설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하는 바람만 무성할뿐 실현여부에 대해서 주민들은 아직까지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도호리 진걸 진입로와 용호리 진입로 포장이 숙원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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