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면 서대리] 인물 많고, 면내 쌀 수확 가장 많은 곡창지대
[안내면 서대리] 인물 많고, 면내 쌀 수확 가장 많은 곡창지대
<1994년 4월 20일 취재>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4.04.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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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면 서대리

안내면 서대리(西大里)는 서쪽으로 도율리, 동쪽으로 동대리, 남쪽으로 정방리, 북쪽으로 월외리와 방하목리와 인접한 작은 내륙마을이다.

서쪽으로 가재봉이 막아 있고 그 줄기가 이어져 동쪽으로는 덕대산이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남쪽으로 비로소 들판이 형성돼 탁 트인 모양을 갖추고 있다. 옥천과 보은을 잇는 문티를 올라서는 초입에 마을로 진입하는 진입로가 길게 나있다.

서대리는 본래 안내면 대동리(大同里)에 속해 있었다. 이 지명이 바뀐 지는 불과 1백년도 채 안된 시점이다. 서대리가 속했던 대동리는 1739년 기록에는 56호에 15세 이상 주민수가 1백87명에 거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890년 기록에는 1백9호에 4백72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거주인구로는 상당히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들 옛 기록에 전하는 주민수는 지금의 서대리를 비롯해 북대리와 동대리를 포함한 면적을 일컫는다. 이런 대동리는 1914년 행정구역 일제 조정시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서대,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동대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914년이면 일제 강점기 하에서였으니 일제가 통치하기 좋은 대로, 그저 행정편의대로 마을의 지명을 단순히 어느쪽에 있다는 방위 표시 하나로 이름짓고 만 것이다.

대동리란 우리 고유의 지명이 있었음에도 이렇듯 전혀 관련없는 지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엄밀히 보면 우리 민족혼 말살책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지금은 수질연구소이지만 이 부근의 유일한 초등교육기관이었던 대동초교가 마을 지명의 명맥을 이어내려온 대표적 사례이다. 서대리는 흔히 옥천읍 서대리(書垈里)와 한글 표기가 같아 혼동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옥천읍 서대리가 고유지명을 이어내려온 반면 안내면 서대리는 그렇지 못했다. 혹자는 안내면 서대리가 더 외진 곳에 위치해 있지만 인물은 더 많이 배출되었다는 말로 구별짓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마을 지명이 갖는 중요성을 따져본다면 이제라도 고유지명 찾기 노력이 행해져야 한다.

현재 서대리에는 64호 2백7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옛부터 대동리에 12개 마을이 있다 했는데 서대리에는 터골, 용촌골, 백암골(뱀골)과 새말 등의 자연마을이 분산되어 있다. 마을 뒤 가재봉에는 주민들로부터 전하는 전설이 있다.  그 옛날 천지개벽을 할 당시의 대홍수로 인근 마을이 모두 물에 잠기고 가재다리만큼 남아 가재봉이라고 했다는 전설. 주민들은 가재봉 보다 높은 덕대산은 덕다리만큼, 금적산은 금송아지만큼 남았다고 얘기를 전한다.

어쨌든 주민들은 가뭄이 들 때면 기우제를 지내고 가재봉 꼭대기에 올라 소나무 가지를 꺾어 불을 놓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말로는 가재봉 정상이 장군이 나올 명당 자리인데 언젠가 정상에 산소를 쓰다 피가 흘렀다는 말도 전한다.  가재봉 중턱에는 수백년이 묵은 것으로 추정되는 아름드리 배나무가 있고 뿌리 밑에서 약수가 나와 주민들이 귀하게 여기는 곳이 되었다.

마을 주민들은 주로 벼농사 위주의 농업에 고추(20여호) 잎담배(11호) 등의 소득작목을 재배한다. 특히 안내면에서는 논 면적이 가장 많아 추곡수매량도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포도, 과수 등 특수작물이 많을 때 이 마을은 주로 벼농사 위주의 농업구조를 가져 지난해만 해도 수매 배정량이 1천7백50개에 달했다.  마을에 일제 때에 축조한 서대 저수지가 있고(옛날에는 대동 저수지라고 했음) 1975년 면내에서는 가장 먼저 경지정리가 이루어졌다.

쌀 생산기반이 닦이기 이전에는 워낙 가난한 마을로 소문나 보은에서는 조만 먹을까봐 딸을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한 곳이 서대리였다는 일화도 있다.  각성바지이지만 7대를 내려온 하동정씨가 6가구로 가장 많은 편에 속하고 고성박씨도 가구수가 많은 편에 속한다.  일찍 경지정리를 마쳐서인지 경지정리 면적이 작은 곳은 1백평 단위로 해놓은 곳이 있는 것을 비롯해 기계화된 요즘 현실과는 맞지 않아 재경지정리가 시급하다는 주민숙원을 안고 있다.

79년도에 1백50만원의 새마을 지원하사금으로 건립한 마을회관이 노후돼 재건립 숙원을 갖고 있는 점도 마찬가지. 이와 함께 마을내 하수구 복개와 더불어 마을안길 포장문제도 숙원 중의 하나다.  작은 마을치고는 인물이 많이 배출된 편이다. 면장과 엽연초생산조합장을 지낸 김병갑씨, 면장을 지낸 정찬우씨와 안내중 교장을 역임한 정친홍씨를 비롯해 육동억씨, 양경석씨, 육동천씨 등 공무원 출신 출향인들이 마을과의 관계를 원만히 이끌어나가는 출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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