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면 용죽리] 옥천전씨 중시조 전숙이 마을형성, 옛이름 전시장
[동이면 용죽리] 옥천전씨 중시조 전숙이 마을형성, 옛이름 전시장
<용죽리...1993년 7월 3일 취재>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3.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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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면 용죽

고려가 멸망으로 치닫고 새로운 조선 건국의 기운이 높아갈 즈음, 고려 조정에 전숙이란 이가 있었다. 전숙은 고려조정에서 판도판서란 벼슬을 역임한 명문이었는데 고려가 망할 조짐을 보이자 일찌감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낙향했다.

전숙이 낙향한 곳이 바로 동이면 용죽리 아랫말로 가시래 또는 지시래롤 불리워왔는데 바로 옥천전씨의 중시조이다. 전숙은 용죽에 내려와 살면서 한때 벼슬에 있었다는 티도 내지 않았고 아무리 부랑자라 해도 설득해서 타일렀을 뿐 매는 손에 올리지도 않는 그런 인격을 갖췄다.


그는 날마다 용죽 앞 금강변에 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세월을 보냈는데 잡은 고기는 '나는 너를 낚는 즐거움을 가졌는데 너는 고통스러웠겠구나'하며 도로 놓아주었다고 전한다.  전숙은 장수를 누려 111살까지 살았다고 전하며 전숙이 항상 냇가에 나가 있는 모습을 일러 늙은 선비가 항상 냇가에 나가 있다는 뜻으로 '지사천'이라 했고 후에는 '지사내'로 변형되었다가 '지시래' '기시래'라는 지역명칭으로 변화되었다.

한 현인을 이르는 말이 지역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쓰이게 된 전형적인 예인바 이 마을 정수병씨가 각종 고문서나 기록을 토대로 증언한 마을의 유래이다.  이렇게 마을이 시작되었으니 마을의 형성은 지금으로부터 6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용소말과 죽촌(대밭말) 2개 자연마을에 63가구가 살고 있어 용죽이라는 이름붙은 이곳은 역사가 깊은 만큼 마을의 안팎으로 수많은 얘깃거리를 안고 있다.

용소말에 있는 느티나무를 비롯해 많은 얘깃거리가 있는 이곳은 주로 복숭아를 많이 재배한다. 거의 절반인 27가구가 복숭아에, 16가구가 포도재배에 나서고 있다.  벼농사 수지타산이 급격히 줄고 복숭아 수입도 예전만 못해 최근 2~3년새 포도로 작목을 전환하는 농가가 제법 있다. 복숭아.포도농가들이 모임을 이룬 과수조합에서 이 마을의 대부분의 소득이 얻어지는데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농촌지역이면서도 13농가가 비농가일 정도로 비농가 비율이 높다. 다름아닌 노령화로 인한 가구수의 증가가 가장 큰 원인. 취재갔던 6월26일에도 이곳에 거주한 한 젊은이가 다른 곳으로 이주해갔다. 직장따라 간 것이지만 온 주민의 아쉬움을 남겨두고...  인구구성상 60세이상의 남자노인은 12명인데 비해 할머니는 30여명에 이를 정도로 불균형하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농촌의 인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특히 교육 공무원이 많이 배출되었다.  착실하며 인사성 바르기로 마을에서 칭찬하고 있는 동이중 김성장 교사를 비롯 동이중 서무과장 김희경씨, 황규창씨(인천), 이규선씨(서울), 황규업씨(부산), 성낙준씨(대전), 성갑영씨(천안) 등이 각각 교편을 잡고 있으며 음성전화국에 근무하는 황선기씨, 옥천군 건설과에 근무하는 전광표씨, 외환은행에 근무하는 황규중씨, 이영복씨와 전교영씨(서울), 문재희씨(서울), 정일영씨(서울) 등이 탄탄한 출향인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현재는 서울에 거주하는 이진태 전 옥천경찰서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 이진태씨는 경찰서장 재직시 마을의 도로포장과 시내버스 운행에 큰 도움을 주었던 인물로 주민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지금까지는 출향인들과 별다른 관계는 가지고 있지 않으나 점차로 출향인들과 마을발전을 위한 방안이 협의되는 등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어 주민들이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여름이면 이원면 칠방리를 휘돌아 마을 앞을 지나는 금강변에 하루 백여대의 차량이 들락거리는 물놀이 관광지로 특히 다슬기 잡이와 고기잡이가 많이 행해지며 휴식처로 이용된다  때문에 여름 한 철이 지나면 강변은 쓰레기 등으로 뒤덮이기 일쑤. 이에 따라 주민들은 여름철이나 가을이면 한 두번은 청소를 해야 한다. 그래도 지금은 쓰레기 되가져가기가 많이 정착되었다고 한주민이 귀띔한다.

여름철을 맞이해 특히 많이 몰리는 것은 다슬기잡이. 잘 잡는 사람이면 하루에 두세말 정도를 잡는다. 물이 조금 빠져있을 때 하루에 두가마 정도의 다슬기가 이곳에서 잡힌다는 설명이고 보면 가히 다슬기잡이의 천국이다.  마을에서는 과일재배가 일반적인데 비해 오흥기씨는 강원도가 고향이면서도 이곳에 정착, 고추농사를 선보였다. 주민들 사이에 고추박사로 통하는 오씨는 말그대로 고추전업농이다.

이와 함께 고재형씨는 포도 비닐하우스 조기재배를 통해 올 93년 2천2백만원의 수이기을 올린 선진농가이다.  용죽에는 자신의 땅을 마을에 희사해 주민들의 교통편리를 도모한 사람이 있어 주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유월출씨가 그 장본인으로 유씨는 마을의 진입로를 개설할 당시 자신의 임야를 마을에 희사, 길이 120m, 폭 6m의 도로를 만드는데 적극 협조했다.

주민들 중 박혜선씨는 눈못뜨는 시어머니를 위해 3자녀와 함께 극진한 효성으로 주민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으며 정수병씨는 마을의 유래는 물론 향토사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묻혀있는 인물이다.용소말 앞 느티나무는 지난 92년 보호수로 지정받은 마을나무로 주민들은 해나무라고 부른다. 해마다 잎이 필 무렵, 한꺼번에 피면 비가 골고루와 풍년이, 몇번에 걸쳐 피면 비가 크게 온다던가 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믿고 있는데 지난해에도 세번에 걸쳐 잎이 피더니만 세번의 큰비가 오지않았느냐고 나무의 신비스런 영험을 확인한다.

또한 마을 남쪽 끝에 위치한 윤일봉은 마을의 기산관측소 역할을 한다. 구딤티를 넘어온 안개가 윤일봉을 넘어와 사그러지면 반드시 3일 이내에 비가 오고 그렇지 않으면 3일 이후라도 비가 오는 등 주민들의 일기예측에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마을 지명에 얽힌 얘기는 더욱 흥미롭다. 마을 입구근처의 못골은 옛부터 부르던 지명이었으나 해방이후 황인업씨가 그곳에 연못을 축조, 저수지가 들어섰으며 강변으로는 두지벌이 있었는데 보통의 뒤집다라는 의미로 쓰인 이 강변 자갈밭은 일제시대에는 사금을 캐느라, 60년대말 70년대에는 경부고속도로에 들어갈 골재를 충당하느라, 최근에는 또 모 건설회사에서 골재채취를 하느라 온톤 강변을 뒤집은 꼴이 되었다.

이를 두고 주민들은 옛선조들의 기가막힌 통찰력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금암리와의 연결도로가 곧 개설될 예정이어서 주민들의 기대감을 부풀게 하고 있다.  많은 얘기를 담고 있는 용죽리인 만큼 주민들의 피에도 여유자적하면서도 나라를 위했던 선조들의 의기가 면면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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