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가화1리] 삼성산이 병풍처럼 싸고 도는 포근한 곳
[옥천읍 가화1리] 삼성산이 병풍처럼 싸고 도는 포근한 곳
  • 옥천신문 webmaster@okinews.com
  • 승인 1994.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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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화1리 전경사진

 법정리동상 금구리에 속해 있는 가화1리이지만 옛 역사를 돌이켜볼 때 결코 만만치 않은 유래를 가진 마을임을 자랑한다. 금구리란 1700년대부터 가화리에 속해 있는 마을의 하나였음을 상기하면 가화리가 원래 마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화리란 지명은 옛 고문서에서부터 발견된다. 1739년 기록에는 당시 읍내면 가화리라 하여 59호가 살았다고 전하는데 현재의 삼양리와 금구리 지역을 관할하는 행정구역이었다. 그후 1890년에는 11호가 살았다고 전하며 1905년 철도가 현재의 금구리 지역을 통과하며 역이 세워지자 1910년 마을 이름을 금구리가 했다. 

따라서 가화리라는 지명은 금구리라는 지명이 생기기 이전부터 불려왔으며 옥천읍 소재지의 근간을 이루었던 마을이다. 가화1리는 가화지하도를 넘어 보성주택까지를 포괄하는 지역으로 '음지가화'로 분류되었으며 '양지가화'는 현재의 삼양리를 일컫는 명칭이었다.

양지가화인 우시장터에 옛 교통요지였던 가화역이 존재해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음지가화로 불렸던 가화1리는 10여년전부터 옥천읍 시가지가 확장하면서 급격히 커졌다.  현재는 360여 세대에 1천100여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큰 마을로 변모했다. 이런 큰 마을을 정작 마을주민들은 '옥천의 달동네'라고 부른다.

옥천읍 중심가와 가까워 시장 접근성이 좋기 때문인지 농촌으로서의 특성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는다. '옥천의 달동네'라고 불리우는 만큼 유동인구가 많다. 1년이면 평균 1백50여세대가 드나든다.  웬만큼 큰 농촌의 1개리가 자신의 형편대로 나가고 들어오는 곳이 가화리의 특성을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화리에 토박이로 살아온 주민들은 김경태 이장을 비롯한 10여가구에 불과하다.

대부분이 직장인들에다 그중 맞벌이 부부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서 주민들이 '달동네'로 인식하고 있다.  자기집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220여가구. 말하자면 전체 주민들 중 1/3은 세를 살고 있다는 얘기다.  월세가 6만원에서 8만원 정도로 싸다 보니 돈없는 서민들이 집장만할 때까지 거주하는 곳으로 생각하기 안성맞춤이다.

최근 삼양빌라, 비원빌라 등을 비롯해 많은 연립주택과 다세대주택 등 공동주택이 100세대가 넘게 이주해 가화리가 확장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80년 이전 대청댐이 수몰되기 시작하자 고향을 잃은 옥천읍 수북리, 오대리, 군북면 소정리 주민들 20여가구가 집단으로 이주해왔다. 이때까지 60∼70세대에 불과하던 마을이 결정적으로 커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부터였다.

처음으로 주민들의 숙원은 가화지하도 건설이었다. 지하도가 없었을 무렵, 국도에서 철도를 건너려 가화건널목을 오르려면 많은 힘을 필요로 했고 정작 연탄 리어카 등을 끌기 위해서는 뒤에서 오는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 건널목을 '인정고개'라고 부르기도 했고 이제는 나이 지긋한 층에서 '향수'로 느끼는 부분이 되었다.

해마다 건널목에서는 열차사고로 인해 주민들의 인명피해까지 속출했고 결국 가화지하도 건설을 진정, 숙원을 이루기까지 했다.  당시로서는 주민들이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나 교통량이 크게 늘어나고 가화리 지역에 대규모의 현대아파트가 건설되고 있는 현재, 주민들은 가화지하도의 폭이 너무 좁아 오히려 주민들의 통행에 장애가 될 요소가 많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더욱이 우회도로에서 옥천읍으로 향하는 집입로가 편도 1차선 폭에 불과해 교통불편요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도 주민들로서는 문제거리다.

주민들은 가화리에서 지하도를 건너지 않고 군서면으로 향하는 옥천읍 삼거리 쪽으로 도로가 개설되거나 기존의 지하도를 넓히고 주민들이 통행할 육교를 건설해야 한다는 등의 방안을 제기하고 있다.  백년대계를 바라보고 수립되어야 할 도시계획 자체가 불과 십수년이 지난 현재에 당장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을 주민들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가화지하도가 설치되기 이전 주민들은 잇따른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목적으로 철로변에 돌탑을 세웠고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의 무사안녕을 비는 행사를 계속 잇고 있다.  마을 뒤로는 신라와 백제의 싸움터였던 관산성이 위치해 있으며 일제시대에 징용을 갔던 주민들이 모두 무사히 귀환한 것도 이 성이 있는 삼성산의 정기를 받은 것이라고 믿고 있다.

현재 옥천상고 유부현 교장, 옥천여중 권식만 교사, 오철환 교사 등 교육 공무원과 경찰서 이상대 보안계장, 군 연근호(산업과), 육심석(사회과)씨 등이 거주하고 있다. 전 새마을지회 곽균상 사무국장도 가화리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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