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면 백지리] 백촌 김문기 선생 혼이 살아숨쉬는 충절의 고향
[이원면 백지리] 백촌 김문기 선생 혼이 살아숨쉬는 충절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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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2.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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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지리 전경

마을을 휘감아 흐르며 여름이면 백사장으로 많은 피서객을 모이게 하는 금강. 금강상류의 맑은 물에 국도변의 산수가 아름다워 고운 심성을 가지고 있는 고향이기에 백지리 사람은 `고향을 떠나서도 예의 그 따듯한 품을 그리워 한다'.

조선초기 충절의 대명사격인 백촌 김문 (1399~1458) 선생이 출생한 곳. 김문기 선생의 충절의 기운을 입고 형성된 마을이기에 군내에서 백지리를 보는 눈은 자못 특별하다. 

조선시대 후기의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의 출생지가 이원면 구룡리이며 중봉 조헌 선생이 큰 뜻을 도모한 곳이 안내면 용촌리라면 이곳 백지리는 김문기 선생이 어린시절을 효자라고 칭송 받으면서 지낸 곳이다.

백촌의 출생지가 이곳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거니와 사단동(社檀洞)에서 백지리 뜰과 강변을 바라보며 서있는 유허비가 충절의 고장임을 알리는 단 하나의 표식이다.  아직까지 마을 주민들도 백촌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지 못해 안타까움을 주긴 하지만 점차로 백촌의 충절이 주민들에게 알려짐에 따라 그 중요성이 인식될 것으로 보고 있다.

백촌은 1399년 조선조 2대 임금인 정종 원년 12월에 이곳에서 태어났는데 본관이 금령(金寧)으로 이름은 효기였으며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뛰어나 옛부터 백지리를 효자동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세종 8년인 1426년 생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참의, 공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1456년 세조 2년에 박팽년.이개.성삼문 등과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육신과 함께 6월8일 순절하였다.

한때 백촌이 사육신에 들지 못했다가 국사편찬위의 고증에 의해 1977년 사육신으로 결정되었으며, 영조 7년인 1731년에 그의 9대손인 김정구의 탄원에 의해 신분이 복원, 의정부 좌찬성이 증직되었고 1805년 순조 5년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세조대에 순절함에 따라 그의 문중은 오랫동안 살던 고향인 백지리를 떠나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현재는 금령김씨 문중이 단 한가구도 백지리에 살고 있지 않다.

그의 행적에 비해 후대의 평가 및 공개적인 추모행사가 전혀없는 가운데 일부에서 몇년 전부터 백촌을 재평가 해야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어 주민들이 찬성의사를 밝히고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유허비 뒤쪽으로 백촌의 생가터가 있었다 하며 옥천이 출생지인만큼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가져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흔읍, 오룡골, 사단골 등 3개 자연마을에 81가구가 살고 있는 백지리 주민들은 김문기 선생의 혼이 살아숨쉬는 고향에서 고향발전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주민들은 현재의 논농사만을 고집해서는 결코 마을의 부유함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아래 옛부터 재배해오던 복숭아에다 사과와 수박.포도 등 소득원의 다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복숭아 재배농가는 30여호에 이르고 있어 가장 많은 농가호수를 차지하고 있는데 올해의 경우 15농가가 수박 멀칭재배를 시작, 수박재배 선진지역인 이웃 영동군 심천면 장동리의 재배기술을 습득하기에 여념이 없다. 이러한 멀칭재배 외에 93년부터는 대형하우스를 설치, 몇 농가가 수박 조기재배를 시도하는 등 특수작물에 눈뜨는 마을로 발돋움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재배되는 사과 또한 앞으로 충분한 주목거리로 대두되고 있다. 장인기(38)씨가 강변 허허벌판을 개간, 십수년전부터 시작된 사과는 현재 2만평을 3농가가 재배, 이름없는(?) 옥천사과의 명성을 드날리고 있다.  옥천의 전국적인 특산품인 포도를 제외하고는 `옥천사과'라는 상표를 붙여서 출하할 경우 지명도가 낮아 값을 많이 받을 수 없어 `영동사과'라는 상표가 붙어 출하된다. 생산자는 물론 주민들도 이러한 사실에 대해 많은 안타까움만 가지고 있을 뿐 현실적으로 높은 소득을 올리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다.

따라서 포도 이외에 `옥천사과'가 전국적으로 지명도를 얻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땅이 비옥해 과수재배에 최적지라고 알려진 백지리 농토가 풍요를 기약할 각종 과실로 넘실댈 날을 주민들은 기대하며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소득작물재배를 위해 주민들은 진작부터 수박 주산지로 이름이 높은 심천 주민들에게 농사기술을 배워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어떤 이론보다도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고 경작자끼리 모여 함께 듣는 말이 농사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백지리는 흔읍을 근거지로 울산박씨 문중이 22대째 보금자리를 형성하며 마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제주고씨 문중도 20여가구가 살고 있어 박씨와 고씨의 집성촌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녀회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도 하나의 자랑거리. 박춘자 부녀회장을 비롯한 부녀회원들은 지난해 휴경지 2천평을 공동경작, 1백만원의 기금을 조성하고 지난 9월30일에 있었던 마을자랑비 제막식에서 음식은 물론 경비까지 부담했다. 그래도 92년 주민들의 숙원으로 남아있던 마을진입로 1.4km와 경로당을 건축, 주민들을 기쁘게 했다.  앞으로 주민들은 마을안길까지 포장을 완료, 비가 와도 별 지장이 없길 바라고 있다.

옥천읍 산업계의 박영범씨가 이곳 출신이며, 옥천공고의 박주용 교사와 서산경찰서의 고현철씨, 영동군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는 전대흥씨와 강항오씨 등이 교직에서 활약하고 있다.  물론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는 전구흥(서울거주)씨, 박희택(대전거주)씨, 이상섭(옥천읍 별제과)씨, 배정만(옥천읍 학생백화점)씨 등 출향인들이 주민들과 한몸이 되어 적극적인 후원자로 나선다.

이제 기존의 논농사 주에서 벗어나 소득작목개발에 눈뜨는 백지리.  여전히 농촌 노동력 부족으로 어려움에 시달릴테지만 그래도 `젊은 농사꾼을 외국에서 수입할 수야 없지 않느냐'는 주민들의 말과 함께 열심히 노력하여 잘사는 마을로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백지리의 앞날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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