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면 법화리] 애뜻한 효행 전해오는 '효자고개' 간직
[청산면 법화리] 애뜻한 효행 전해오는 '효자고개' 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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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96.10.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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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리 전경

청산면 법화리에는 모두 38가구가 살고 있다. 주민수는 9월말 현재 1백26명. 군내 어느 곳이나 그렇듯이 이 마을의 고령화 현상도 꽤나 심각하다.  특히 노인층 가운데서도 80세이상의 고령층이 13명으로 다른 마을에 비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선 왠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도 노인층에 끼는 것이 쉽지 않다.

작은 마을이지만 주민들은 각성바지다. 마을의 위치는 보은군 마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경계지점은 예로부터 '백제미' 고개로 불리워지던 곳으로 지금에 이르러서는 효자고개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효자고개에 얽힌 얘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고개에 얽힌 사연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소개됐고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떠들썩했다.  때는 1974년 섣달 그믐날인 1월22일, 설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때마침 중부지방에는 폭설주의보가 내려져 있었고 경상북도 상주군 하서면 사산초교 2학년에 다니던 정재수 어린이는 아버지 정태희씨의 고향이자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법화리 복우실 마을에 설을 쇠러 아버지를 따라 상주에서 보은군 마로면을 거쳐 밤길을 재촉했다. 

가던 도중 아버지는 어느 술집에 들러 술 한잔을  마셨고 그 술이 취한 가운데 정재수 어린이는 아버지에게 길을 재촉했으나 결국 효자고개를 넘지 못한 채 고개 정상 부근에서 눈발을 헤매다가 부자가 얼어죽고 말았으니 이튿날 이들 부자의 시신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는 얘기다.  "잡은 닭 한마리를 보자기에 싸서 갖고 있었고 아버지의 양복 윗도리로 덮은 채 꼭 끌어안고 죽어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정재수 군의 아버지 정태희씨와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이 마을 육창수(58)씨가 다음날 눈밭 속에서 정재수 부자의 시신을 수습하며 느꼈던 안타까움을 다시 털어놓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안타까움을 가슴에 품고 정재수 효자의 효행이 난세까지라도 잊혀지지 않고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어 효행의 시금석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효자비와 효자고개를 재정비하는데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촉구하고 있다.

효자고개 주변의 농토에서 일을 하던 이 마을 주민들이 96년 봄쯤 상주시에서 정재수 효자비를 재정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그곳으로 답사나온 일단의 관계자들로부터 들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시.군간 협의를 통해서라도 효자고개 및 효자비 재정비 계획은 하루빨리 추진되어야 한다는게 주민들의 일치된 생각이다. 

주민들은 또 효자고개가 군도로 승격된 이상 확포장을 서둘러 보은쪽 6개 마을 4백50여 가구의 생활권을 청산으로 끌어들일 경우 면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상당한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또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방안으로도 꼽히고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법화리 주민들만의 작은 숙원이 아니라 청산면 전체 주민들에 해당되는 커다란 숙원인 점을 강조하고 있다.

법화리는 본래 예곡리에 속해 있었다. 근세인 1890년의 기록에는 청산현 북면 예곡리였고, 그후 1914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청산현의 일부 면을 합해 청산면으로 만들고 옥천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예곡리에서 분리해 법화리로 분리되었다.  법화리라고 부르게 된 것은 복우실, 또는 버구실의 법자와 화동을 조합해 만들었으면 지명의 유래에 대해 정확히 증언하는 주민이 없어 아쉬움을 주고 있다.

법화리 주민들은 주민화합 및 단합이라면 특별한 자긍심을 느끼고 있을 정도로 하나된 힘을 과시한다. 지난 91년 삼방리에서부터 마을에 이르기까지 1.3km의 진입로를 주민자체 공사로 출향인들과 더불어 손수 시멘트를 비벼넣고 지게질을 해가면 억척같이 완공을 해냈는가 하면 94년에는 번듯한 마을회관을 건축해 숙원의 하나를 풀었다.  객지에 나가 있는 출향인들과의 관계도 여는 마을 못지않게 원활하다.

'잘사는 사람, 빽 있는 사람'은 없어도 마을의 궂은 일에는 언제든디 발벗고 나서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음은 주민들의 가장 큰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이장이 회장을 맡고 있는 `고향진목회'의 구성도 이들에게는 큰힘이 되고 있다.   현재 주민들의 가장 큰 소득 작목은 다름아닌 인삼. 마을에 사는 농가치고 90% 이상이 인삼 경작농가이다. 옛부터 만월리와 함계 청산면내 최대 보리 생산지였던 이 마을이 인삼으로 소득작목이 바뀐 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전쯤.

보리는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져오다 올들어 1농가만이 재배하고 있는데 이 마을이 95년까지는 군내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우리밀 재배단지였음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93년부터 시작된 우리밀 제배는 기본적으로 타산이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확하는 데에 따르면 어려움 등으로 올해의 경우 마을에서 단 한농가만이 재배하고 있을 따름이다.  효자고개를 넘어 속리산을 갔고 속리산을 통해 소백산을 거쳐 태백 준령으로 향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던 곳에 위치한 마을은 주민들의 화합속에 풍년들녘으로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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