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에서 책읽기>바라보고 기울기
<포도밭에서 책읽기>바라보고 기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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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1970.01.0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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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이면서 무엇보다 뜨거운 사회운동가이던 존 버거는 노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고 많은 책을 남겼다. 그리고 구순의 나이로 작년에 타계했다. 비록 긴 세월을 살아주었지만, 흠모하는 작가가 세상을 떠난 사실에서는 큰 상실감이 느껴졌다. 나는 한동안 허전한 마음으로 그의 산문집들을 다시 찾아 읽었는데 그러다 우연히 2015년 무렵 그의 일상을 담은 영화가 제작된 것을 알게 되었다. 제목은 <존 버거의 사계>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지금도 영화를 찾아볼 수 있다.

90여 분 영화 중에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부분이 있다. 영화의 끝 부분에 나온, 어쩌면 매우 평범한 장면이다. 존 버거가 대화 친구이자 이 영화를 제작한 틸다 스윈튼의 자녀에게 오토바이를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오토바이를 타본 적 없는 어린 친구에게 건네는 그의 조언은 간결하다. 몸에서 힘을 빼고 편하게 앉아 가고 싶은 곳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가고 싶은 곳을 '바라볼' 때 몸은 자신의 전체를 끌고 그쪽으로 기운다. 그가 알려주고자 했던 오토바이 조정하는 원리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신선한 '강습'을 듣고 나니 새삼 '바라본다'는 행위에 각별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이나 바라볼 수 없다. 나는 바라보는 쪽으로 기울 테니까.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의 글들은 모두 글자로 기록한 스냅사진들 같다. 존 버거는 여기에 포토카피(글로 쓴 사진, Photocopies)라는 이름을 붙인다. 총 스물아홉 편. 각각의 짧은 글들은 모두 누군가들의 한순간을 글로 '포착'하고 있다. 존 버거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누군가에 기운다. 그 대상은 때로는 오랜 친구이기도 하고,때로는 세상에 알려진 어느 인물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통성명도 없이 스쳐지나간 누군가들이다. 라코스테 스웨터를 입은 남자,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남자, 샤프카를 쓴 젊은 여인, 거리의 배우 등등. 때로 그가 바라보고 기록하는 대상은 풀밭 위의 그림, 잔에 담긴 꽃 한 묶음, 바구니 안의 고양이 두 마리가 되기도 한다.

이 기록들은 마치 셔터스피드를 길게 설정해 찍은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대상인 인물들은 찰나이되 느리게 흐른 찰나에 담기는 것이다. 그러니 이 포토카피들의 목적은 인물을 정확히 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목적일까.



'내가 그녀를 그리기 시작한 적이 한 번 있었다. (중략) 나는 대상과 닮게 그리는 것이 인물화의 조건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닮을 수도 닮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것은 신비로 남는다. 이를테면 사진의 경우 '닮음'이란 없다. 사진에서 그건 질문조차 되지 않는다.'



결국 정확을 떠나서 대상을 향해 질문을 하는 것, 그러면서 대상에 머무는 신비로움을 어루만지는 것이 목적이 아닐까. 누구나에게 머무는 신비로움. 하지만 금방 고개를 돌려버릴 때는 알아내지 못할 신비를 오래 바라보며 따라 그리는 작업. 이것이 존 버거가 시도하는 포토카피라는 생각이 든다.

지원: 지역신문발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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