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옥천현대사 - 무감각한 역사의식 깰 때
발굴 옥천현대사 - 무감각한 역사의식 깰 때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1999.08.14 00:00
  • 호수 4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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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3년 9월4일자 본보는 일제가 우리의 민족혼을 압살하려 했던 상징인 황국신민서사비가 아직도 죽향초등학교에 남아 있으며 그것이 '통일탑'이라는 명분을 둘러 쓴 채 학생들에게 통일의 상징으로 교육되고 있다는 사실을 동문 및 주민들의 증언을 빌어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인 94년 2월 KBS와 황국신민서사비와 그 기초석으로 일본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돌들이 쓰여진 현장을 공동으로 발굴, 보도했다.

당시 발굴된 자갈에는 붓글씨로 한문이나 일본어를 사용한 황국신민(皇國臣民), 천황폐하(天皇陛下), 내선일체(內鮮一體), 충성(忠誠) 등의 문구가 쓰여져 발굴되었고 증언자의 한 사람이었던 김용성(73)씨는 자신이 직접 써서 넣었던 자갈을 찾기도 했다.

한마디로 일제가 초등학교 1학년 고사리손에서부터 얼마나 소위 황국신민화 책략에 의한 민족혼 말살책을 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당시 죽향초등학교에 세워졌던 아동용 '황국신민서사'는 3개항의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나는 마음을 합해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한다 △나는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된다.

지금도 지용생가에 있는 청석교로 복원되어 있는 황국신민서사비를 잘 살펴보면 3개항의 서사 내용이 적혀 있던 부분이 나타나 있다. 해방 후 안남초등학교나 군서초등학교 등지에서는 이러한 서사비가 주민들에 의해 철거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죽향초등학교의 그것은 철거되지 않았다.-95년에 동이초등학교에서도 서사비가 발굴되어 철거되었다.-정확한 설명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돌이 너무 좋아 없애기가 아까워 학교에서 '통일탑'으로 활용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어찌되었든 분명한 것은 중요한 역사교육 자료가 사장되고 있고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용생가 안에 의미없이 버티고 있는 청석교. 지용생가를 찾는 관광객들이 한마디씩 이 돌이 왜 이 곳에 있느냐고 물을 때 군 공무원들은 실개천에 있었던 다리였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설명이야 옳지만 이 돌이 어떻게 우리의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지 우리가 그것을 교훈삼아 어떻게 보존하고 있는 지에 대한 설명은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게 관계자들이 토로하는 얘기다.

굳이 아픈 역사를 교훈삼으려는 프랑스나 독일 등 외국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이 정도면 우리의 역사의식은 무감각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싶다.

덮어두고 방치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 실리가 있는 것만 쫒다 보니 작은 사안에 불과하지만 가장 중요한 우리의 얼을 잊고 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빠른 시일 안에 우리 고장의 중요한 역사자료로 꾸며지는 장면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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