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보존 못한 것이 '한'
우리역사 보존 못한 것이 '한'
함께사는 세상 [115] 구읍 주민 생활상 꿰고 있는 심재호씨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4.06.12 00:00
  • 호수 7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심재호씨

옥천읍 교동리 게이트볼장에서 게이트볼을 치고 있는 심재호(80·옥천읍 문정리)씨를 만난 것은 오후 5시가 넘어서였다. 죽향리로 돌아온 심씨는 죽향리 경로당이 있는 앞터를 관아 터로 지목한다. 

지병을 치료 중이어서 아직 행동도 다소 불편하지만 심씨의 기억만큼은 수십 년 전의 옛 일을 기억하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심씨는 군수의 옛날 사택이 있던 자리와 현재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지만 군수가 새로 마련했던 사택, 관아를 찾은 사람들이 주로 머물렀던 객사 자리도 안내했다.

■옛 관아터, 사람들의 생활 중심지 구읍
객사가 있던 자리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의해 파란색 문을 가진 헌병지대 건물로 사용되었다. 관아 앞에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실개천 양쪽으로는 나뭇꾼들이 해온 나뭇장이 죽 들어섰어요. 그리고 구읍을 가르는 이 큰 길 가에는 쌀이나 채소, 누룩전도 별도로 섰어요. 피천이라고 해서 정지용 생가 밑으로는 고기를 파는 곳이었고요.” 

심씨는 진주에 살던 부자 김기태씨가 옥천의 풍수를 보고 고을이 있는 뒤의 산이 ‘일자문성’이라고 해서 부자로 오래 지속될 터로 옥천을 꼽고 옥천으로 이사왔다는 말과 지금까지도 부자의 대명사로 거론되는 오국장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았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이 오 국장이 살던 집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씨에게서 얘기를 듣고 있으려면 옛 관아를 중심으로 한 옛 사람들의 생활상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진다.  얘기가 실개천에 놓여져 있던 청석교에 이르렀다. 

“청석교를 잘 다듬으면 교육자료도 되고 읍내(구읍) 자랑거리도 될 수 있는데 그냥 내버려두고 있어요. 청석교는 옥천장에 나무를 팔러 오던 홍장군이라는 장사가 두 개의 돌을 양 손에 끼고 와서 놓았다는 전설이 있어요. 몇 백년은 됐는데 지금 그 유래를 아는 사람도 없거니와 자료로 쓰려고도 안해요.” 
 
■홍장군이 두 팔로 갖다 놓았다는 청석교
청석교로 사용됐던 돌이 죽향초등학교에서 일제가 전쟁에 광분했을 때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던 황국신민서사탑으로, 해방 이후에는 통일탑으로 변질된 후 언론(본사와 KBS의 일제잔재 청산보도)의 문제제기로 폐기되었지만 지용공원 내에 아무런 설명없이 그냥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정지용 시인의 생가가 있던 곳에 있던 본래 청석교는 일제 때 마차가 지나는 다리로 다시 놓아지고, 청석교는 개천 위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옛 동성교회 자리에 있었던 우시장을 건너려면 옮겨진 청석교 돌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소 주인들이 돌다리를 건너려고 하지 않는 소를 달래고, 어르는 모습을 심씨는 자주 봤다. 

“어릴 때부터 구읍에서 큰 소는 돌다리를 잘 건넜어요. 그런데 돌다리를 건너보지 않은 외지 소들은 한참을 실랑이를 해요. 소도 돌다리가 무서웠던 겁니다.” 

지용생가에 놓여진 근대식 교량은 돌다리 이름을 따서 청석교라고 했다. 다시 개량되면서 청석교라고 썼던 화강암 교명주가 개천 둔치에 버려져 있었는데 어느날 없어졌다. 청석교라는 교명주가 없어진 후에야 심씨는 진작 챙기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  그래서 심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옛 오국장집 주택의 외형을 변형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비록 너무 불편했던 주방은 현대식으로 바꾸었지만 외형과 지붕은 변형시키지 않고 보존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련군 포로로 잡혀 넘은 1년간의 사선
원래 심씨가 태어난 곳은 상계리였다. 그는 나이 팔십이 되도록 군대를 다녀오느라 떠났던 시간, 한국전쟁 때 떠나 있던 시간 등 불과 4∼5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고향에서 생활했다. 그는 1945년 봄이 오기 전에 일제에 의해 징병되었다. 스무 한 살 때다. 만주에 배속받은 그는 소련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해방 후 바로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만주 연길과 금창에서 1년 가까이 포로 생활을 한 끝에 해방 이듬해 4월 고향 땅을 밟게 되었다.  

“포로생활요? 말도 말아요. 한 번은 팔꿈치 위 알통이 있는 부분을 만져보니 손목잡듯이 손가락으로 잡혀요. 사람이 이렇게 마르고도 살 수 있구나 했죠.” 

한 번은 수용소에 열병이 번졌다. 심씨는 자신의 오줌을 먹고 병을 이겨냈다. 심씨 주변의 특히 수용소에 있던 4명의 옥천 사람들도 살아남았다.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죽향초 28회 동창인 한용수씨, 나중에 철도보선국소장을 했던 최양춘씨, 동이면 남곡리에 살았던 남씨, 외사촌인 박희정씨. 외사촌은 먼저 집에 돌아오고도 고모집에 알리지 못했다.

다른 자식들은 다들 돌아오는데 당신 자식은 아무런 소식도 없이 죽었다고 여겨야 하는 고모·고모부가 상심할까봐서다.  부모님은 심씨를 전장에 떠나보낸 후 한시도 편할 날이 없이 보냈다. 1년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모님은 옥천역에 나가 아들이 오는 지를 살폈다.

■노인회·번영회 구성에 앞장서다
심씨가 옥천에 도착한 것은 새벽녘. 어머니는 구렁이가 목을 감아 목을 죄는 꿈을 꾼 후 일어나 물레를 돌리고 있는데 사립문이 열리며 동생을 부르는 심씨의 목소리가 들렸더란다. 이후 심씨는 청주법원에 근무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일생을 사법서사 사무소에서 일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퇴직 후 심씨는 구읍지역의 노인회를 구성하는데 앞장서 구읍노인회를 창설해 2대 회장을 맡고, 번영회도 만들었다. 구읍 복지회관을 건립하게 된 것도 번영회 사업으로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다 감옥에 갔다 온 전좌한 의사에 대한 젊은 시절 기억도 또렷했다.

“하도 일본놈들이 쫓아다니고, 잡아가고 하니까 일부러 미친 척 했어요. 해방이 돼서야 옷을 깔끔하게 입었어요. 멀쩡하게 우리 부모임 성함도 잘 알고, 나에게도 잘 대해 주었어요.” 

그는 지금이라도 일제 때 친일을 했던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해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좌한 의사의 예를 들며 나라독립을 위해 몸바쳤던 사람들은 엄청난 고생을 했는데 일제 때 친일을 해 잘 살던 사람들이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거꾸로 되었다는 것이다. 

“팔십 줄에 들어서니 못해나온 일도 숱하고 한스럽기만 해요. 어른들 얘기할 때 메모라도 해두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이제 뭐 도저히!”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 고장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더 상세히 그에게서 들어야 한다. 그가 팔십 평생 한으로 품고 살아온 후회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 148년전 건축한 심재호씨의 집

■ 148년전 건축한 심재호씨 집, 상량문에 1856년 건축연대 밝혀
심재호씨가 살고 있는 집이 지금으로부터 148년 전인 1856년에 건축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고장의 부자로 알려진 ‘오국장의 집’으로, 이후 몇 단계를 거쳐 심씨가 지난 1972년 구입한 것이다. 

특히 옛 옥천군의 소재지로, 관아가 있고, 양반들이 주로 모여 살아 최근까지도 남아 있었던 옥천읍 문정·죽향·상·하계리 지역의 전통 한옥 형태의 주택들이 대부분 철거돼 아쉬움을 주고 있는 가운데 심씨가 살고 있는 주택의 건축연대가 밝혀진 것이 그나마 아쉬움을 덜어준다. 

심씨는 집 천장 상량대의 글씨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고 밝혔으나 9일 심씨와 기자가 상량문의 연대를 다시 확인한 결과 집 건축연대가 1856년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상량대에는 「숭정기원후사병진십이월(崇禎紀元後四丙辰十二月)」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으며 건축된 시간 등을 적은 나머지 글씨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확인이 쉽지 않았다. 

숭정은 중국 명나라 말기 황제인 의종의 연호로, 후에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 당시 청나라를 오랑캐라 하고 명나라를 섬겼던 조선시대 사대의식에 의해 숭정을 기준으로 집 건축 연도를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 심재호씨의 집 상량문

숭정기원년이 1628년인 바, 이후 네 번째 병진년에 이 집이 건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씨가 집을 살 32년 전, 이전 주인으로부터 이 집이 100년 정도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심씨의 말을 감안할 때, 전해져 내려오는 집 건축연대와 비교적 맞아 떨어진다는 걸 말해준다. 

이와 관련 군 문화공보실 조해숙 문화재담당은 “심재호씨의 집은 부엌이 변형돼 원형이 바뀐 점 등이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요인”이라며 “오래 되었다고 모두 문화재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밝혀진 연대 등을 참고하겠다”고 말했다. 조 담당자는 또 지은 지 50년이 넘은 근대건축물 등을 대상으로 한 근대문화재 등록을 위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심재호씨의 집도 조사를 마쳤다고 밝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