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건국 선생은 두 마지기 정도의 적은 농사를 짓고 이부자리도 제대로 없이 살 정도로 극빈하였다. 또한 농사일은 돌보지 않고 동네 이장일을 보면서 부고장, 제문, 축문, 편지 등을 대필해주고 마을에서는 그 보답으로 추수할 때면 보리와 벼를 걷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인근지역에서 '학방 할아버지' 또는 '학방선생'이라고 불릴 만큼 한학에 밝아 문서 대필 이외에도 청산향교나 옥천향교를 오가며 강의나 문서와 관련한 일을 보았다고 전한다.
중간 정도의 키에 준수한 이목구비를 갖추었고 목소리가 아주 컸다고 한다. 지역사람들은 이건국 선생의 학식 때문에 존경하고 어려운 분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건국 선생은 전통 한문 공부만 하였을 뿐 근대식 교육은 받은 일도 없고 오로지 옥천을 중심으로 보은, 영동, 상주 등지에서만 활동했다.
1945년 7월28일 오후 11시 고향인 효목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용:새로 발굴한 신소설 월하탄금성-이복규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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