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삶은 노동과 시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시인의 삶은 노동과 시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함께사는 세상[110] 농사꾼 시인 김덕관씨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3.11.22 00:00
  • 호수 6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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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관 시인

늙은 농부는
이마에 땀방울 씻다가
쟁기도 놓고
봄 냄새 묻은
시가 쓰고 싶다
 -첫시집 농사꾼에 수록된 ‘봄 냄새’ 중에서

김덕관(64) 시인을 만난 것은 옥천농협가공공장 경비실에서였다. 한 평도 되지 않는 그 작은 공간은 그의 노동현장이며 시 창작 공간이었다. 지금, 시인은 살기 위해 노동을 하고, 살기 위해 시를 쓴다. 만일, 이를 구질구질한 삶의 단면으로 이해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의 삶을 공유하고 있는 시와 노동은 그 순간 가장 순수한 모습을 지닌다.

신장이 좋지 않은 그는 일주일에 한 차례씩은 병원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올해로 꼬박 6년째다. 최근에는 당뇨까지 심해져 엄지발톱이 뽑혔다.  주머니에 들은 물건을 꺼내듯 무감하게 양말을 벗어 보여준 그의 엄지발가락에는 발톱대신 삶의 무게만큼이나 두툼한 붕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병원비 벌려고 이렇게 일하는 거지, 신장이 안 좋아서 힘든 농사일은 못하고. 또 할 수 있다고 해도 농사져서는 병원비 대기 힘들지. 지금 일 안 하면 죽는 거지 뭐.”
시인은 남의 얘기하듯 무감하게 말을 하곤 하회탈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듣는 사람이 오히려 무안할 정도다. 

"지금 귀신새가 온다고 해도 서슴없이 손 내밀고 나설 수 있어.” 
시인에게 이런 여유를 주는 것은 시였다. 

"시를 쓸 때는 내가 아프다는 사실도 병원을 다녀야 한다는 사실도 잊을 수 있거든.  병원에서 의사들도 그래. 내가 시를 쓰면서 마음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병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거라구. 아직도 책을 읽거나 시를 쓰면서 밤을 새울 때가 많지.” 
노동과 시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그의 삶을 끌어가고 있다.

◆92년 농민문학지 통해 등단

농사꾼〈농민문학지 등단시〉

운명의 바퀴는 속절 없는 것이라
가진 것도 없고 못 배운 죄라서
눈만 뜨면 개미같이 일하려
한 줌의 흙덩이라도
풀 한 포기 더 뽑으려
마른 손에 호미며 삽을 들고
가쁜 숨 몰아 쉬며 황소처럼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죽을 틈도 없는 우리들은 농사꾼

고운 얼굴 화장 한 번 모르는 촌뜨기
이슬 젖은 무색치마 마를 새 없이
벌써 김매다 윗적삼 땀방울 흥건한
가난 벗고 자식 공부 시키려
짓눌린 거짓 없는 소망 안고
침묵하며 아픈 세월 사는 농사꾼 아내

내일에 기약은 몰라도
한 번쯤 잘 살아 보려는
햇빛같이 맑은 마음으로
우리는 일 밖에 아무 것도 모르는
초록빛 들녘 보다도
늘 푸른 삶이 보람이어라


김덕관(64) 시인의 고향은 동이면 지양리다. 옥천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조금하다가 군에 입대해 10년을 복무했다. 김 시인이 처음 시를 쓴 것은 바로 군에 복무할 때 군대 기관지에 시를 투고하면서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시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안 했다는 것이 옳겠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글쟁이들은 맨 소주만 마시고 폐인이 되더라구. 저거 하면 밥 먹고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지.”

중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실린 `아카시아’라는 시가 그렇게 좋았고,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시인은 술에 절은 폐인’이라는 선입관이 시를 쓰고 싶은 그의 욕망을 억눌렀다. 이런 자기방어장치는 그의 나이 마흔이 넘어 `봄길’이라는 시를 중도일보에 투고할 때까지 계속 작동한다.

“군에서 제대 한 후 결혼하고, 80년도에 현대건설 기술자로 쿠웨이트와 이라크에 가서 일을 했는데 도합 4년 정도가 되지. 그 황량한 사막에서 얼마나 외로웠겠어. 고향생각도 많이 나고. 집사람한테 일주일에 한 통씩 편지를 썼어. 그리고 돌아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데, 어느 날인가 아내가 그래. `편지 내용 보면 참 글귀가 좋은데 왜 묵히냐?’그래서 `그럼 내가 일하다가 말고, 시 쓴다고 들어가도 아무 말 안 할거냐?’라고 물었지. 그랬더니 `그러겠다'고 그러더라구.” 

들에서 농사일을 하며 우연히 아내와 나눈 이 같은 대화가 억눌렸던 시에 대한 열정을 풀어놓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중도일보에 실린 김 시인의 시는 대전의 해정문학회와 연결되는 고리가 되고 이어 농민문학지를 통해 '농사꾼', `농사', `동학사' 등 세 편의 시로 92년 시단에 등단했다.

◆시는 자연스런 삶의 행위
김 시인이 등단 후 지금까지 쓴 시는 대략 5천여 편, 컴퓨터로 문서작업을 하고, 표지 디자인을 통해 200편, 400편씩 묶어 만들어 놓은 책만 21권이다. (이중 시집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농사꾼'과 `그 때 그 시절', 두 권이다.)

시인이 시를 쓴 기간을 생각하면 결코 적지 않은 양이다. 억눌렀던 욕망이 한꺼번에 분출하면서 신기를 끄집어낸 무당 같은 열정으로 만들어낸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시'를 특별한 사람이 해내는 예술적 작업으로 인식했다면 병원비를 벌어야 하는 노동의 현장에서 시를 쓸 수 있는 여유를 결코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시인에게 자신의 시중 가장 좋아하는 시가 무엇인지 물으니 갑자기 아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내가 자란 산촌에 진달래 피고, 머루·다래 엉클어진 참새 놀이터…."
 가사는 낯설지만 그 음은 익숙하다. 우리가 흔히 부르고 자란 `고향의 봄' 노래에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기억하는 고향의 모습을 시어에 담아 부른 것이다.
 
"어느 자리에선가 이 노래를 불렀더니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게 정말 우리 고향의 봄'이라고 그러더라구."

김 시인 `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시는 늙은 농부가 들판에서 일을 하며 땀을 닦는 그 순간 떠오른 시정을 갖고 풀어낼 수 있는 자연스런 삶의 행위였다. 들판에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며 노동의 고단함을 나누듯 시를 통해 사람, 세상, 자연과 교감한다. 그렇기에 그가 써내는 시의 스펙트럼은 정말 넓다.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이건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의 시에 소재가 된다. 

고향산천의 아름다운 정경부터 친구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망월동 묘역에서 생각한 5.18광주민주화항쟁까지. 그의 조그만 경비실 책상 위에는 재생지가 클립보드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그가 밤을 새우며 볼펜으로 꾹꾹 눌러 써 내려갈 시어들을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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