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서 제주까지...역사의 급류에 휩쓸린 삶(1)
만주에서 제주까지...역사의 급류에 휩쓸린 삶(1)
함께사는 세상[109] 군북면 비야리 이경서 씨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3.08.30 00:00
  • 호수 6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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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북면 비야리 이경서씨

일제 강점기를 살아내고, 한국전쟁의 폭풍 속을 걸어온 70∼80대를 만나보면 모두 비슷한 기억을 갖고 있다. 대부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의 기억들이다. 개인이 겪은 고통의 크기를 `크다', `작다'라고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군북면 비야리 이경서(77)씨의 기억은 남다르다.

만주부터 제주까지, 그가 삶을 살면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밟아야만 했던 땅덩어리다. 중·일전쟁을 겪어야 했고, 얄타회담 후 소련의 일본 공격에 따라 일어난 전투 한 가운데도 그는 서있었다. 이어 제주 4·3항쟁이라는 급류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빗겨가긴 했지만 결국 한국전쟁 발발 후 육군 제1훈련소에 입대하면서 제주 땅을 밟게 된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아챌 새 없이 이경서씨의 삶을 관통한 사건들이다. 수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 그는 웃으며 당시를 얘기하고 있었지만 `한 번 웃음'으로 흘려버리기엔 한 개인이 담당해야 할 몫으로는 너무 버거운 역사였다.

그는 인터뷰가 끝난 후 말했다.
"못 입고, 못 먹어서 힘든 것보다 객지에서 하는 고생이 더 힘들었다"라고.
    
■1943년 18살에 징집통지서 … 만주 땅으로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증약초등학교를 졸업한 이경서씨는 군북면장 이름으로 날아온 통지서를 받는다. `군속'으로 징집된다는 통지서였다. 1943년으로 이경서씨는 기억하고 있다. 군북면에서 모두 네 명이 징집돼 만주로 떠났다. 그 중 한 명과는 요즘도 잘 어울리는 친구다.

소련과 만주의 국경지대에 있던 한 병마부대에서 말을 돌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어린 나이에 고향 생각나서 힘든 것은 당연하지. 그래도 다른 부대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그렇게 심했다는데 우리 부대는 그런 건 없어서 편했지. 워낙 까부는 성격이라 어디가도 잘 지내는게 내 천성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부대에서 그는 한 일본인과 알력이 생겨 동안성(지금의 흑룡강성) 동안시에 있는 헌병대로 전속되었다. 그 헌병대에서 그는 해방을 맞는다. 만주에서 맞은 해방전후의 기억은 그의 머릿속에 정확한 날짜까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1945년 … 해방을 알리는 삐라가 뿌려지고
"8월7일이었어. 한 군관하고 밀산이라는 곳을 다녀오는데 소련 비행기가 하늘 위를 날더라구. 그걸 보고 일본놈이 `우리 일본제국은 저렇게 비행기도 잘 만든다구'그러는 거야, 근데 다음날 그 비행기가 동안시내를 폭격해대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렇게 소련, 중국군인들에게 쫓겨가면서 큰산으로 들어갔는데, 이름을 잃어버렸어도 그 풍경은 다 생각나지, 그 산에 먼저 온 일본군인들하고 만주를 개척하러 들어온 일본사람들이 꽉 차 있더라구. 8월18일쯤 되어서 산에 삐라가 뿌려졌지. 조선말, 중국말, 일본말로 되어 있는데 주워서 읽어보니까 `8월15일 일본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해서 우리나라가 해방이 됐다'는 거야. 우리가 국민학교 3학년까지는 한글을 배웠지만 그 다음부터는 다 일본말만 배웠거든, 도대체 `해방'이 뭔 소린 지 알 수가 있어야지. 여하튼 8월19일 소련군이 포위를 하고 위협사격을 하는데, 일본군인들은 총을 한 군데로 모아서 모두 불지르고, 장교들은 자기 칼로 자기 배를 그어서 죽고 난리도 아니더라구. 참말로 기가 막히지. 머리카락이 하늘로 올라가서 만져보면 딱딱해, 어린 나이에 얼마나 무서워, 그런데 산밑에서 방송을 해 `조선사람부터 다 나오라'구. 그래서 산에서 내려갔지. 그 와중에도 친일생각을 꽉 가진 조선인은 안 나오더라구."

그렇게 생지옥 같은 곳에서 나오니 모여 있는 조선사람이 한 2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이경서씨를 포함한 조선인들은 소·만국경지역에 거대하게 지어놓은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일본인들과 분리 수용되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소련군의 대우는 나쁘지 않았다. 하루에 한 개씩 지급되는 귀리로 만든 일명 `헐레발빵'이라는 것으로 배를 채워야 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버틸만 했다.

■1946년 … 만주에서 고향을 향해 출발하다
3개월 정도 생활을 했을 때 다시 조선인들을 모아놓고 소련 장교가 일장연설을 했다.
`너희들이 우리의 적이 아닌데 억울할 것이다. 조국까지는 못 데려다 주지만 만주까지는 데려다 줄 테니 고향을 찾아가라.'

그렇게 다시 만주로 돌아온 그는 다른 조선인 9명과 짝을 이뤄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한 마을에 들어섰다. 마을 이름은 동안성 복전툰. 마을의 툰장 집에 잠시 몸을 의탁한 채 겨울을 보낸 후 해방된 지 한 해를 넘겨 1946년이 되어서야 자유로운 몸으로 고향을 향했다.

"아이구 그 때 생각하면…. 주머니에는 돈 한 푼도 없이 걸어서 오는데, 완전 거지였지. 중국놈들이 조선인을 얼마나 무시하는지 그 놈들한테 두들겨 맞기도 많이 맞았고."

군속으로 일본부대에서 일을 하던 시절보다 더욱 끔찍했던 시절이었다. 음력 2월, 연변의 도문을 거쳐 그 때까지도 얼어있던 두만강을 건너 동두천까지, 소련군에게서 발급받은 석방증을 피난증으로 바꿔 세천까지 기차를 타고 돌아온 것이 1946년 4월6일이었다. 기억을 꺼내는 이경서씨의 담배를 태우는 횟수도 그만큼 잦아진다.

■1950년 … 한국전쟁 발발, 다시 고향으로
귀향 후 해방정국 속에서 그는 46년부터 서울형무소에서 간수로 근무하지만 뒤를 봐준 고향 사람이 좌익으로 쫓겨나면서 함께 직장을 그만두게 된다. 이어 48년 충남경찰에서 뽑는 경찰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후 경찰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던 중 제주에서 4·3항쟁이 일어나고, 제주도에 출동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그것도 그만두었다.

다행히 복직원서를 제출해 대전형무소에서 다시 근무할 수 있게 되고 삶이 안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1950년 6월24일 야간 근무를 마치고 후임 근무조에게 일을 넘기려 할 때 `비상'이 걸린다. 한국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교도소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고, 혼란한 상황에서 이경서씨도 고향인 군북면으로 다시 돌아왔다.

며칠 지나자 비야골은 피난민들로 가득 찼고 그 와중에 국군 패잔병 5명이 마을에 들어섰다. 그들은 `잘 데를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교도소에서 근무하다 집에 와있는 전력이 찜찜했지만, 이경서씨는 한 집의 마당에 멍석을 깔아주었다. 그리고 문밖을 나서던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이 불길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비야리 우물 주변에 젊은이들 4∼5명이 빙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곁으로 국군 한 명이 그 대화를 가만히 듣고 서있었다. 고개를 돌려 이씨를 바라보던 청년들은 동시에 국군을 발견하게 되었고, 갑자기 일어나 `후다닥' 도망가기 시작했다.

■골짜기에서 … 이승에의 마지막 밤이 아닌가
"나도 관리로 있었고, 젊은 사람인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어. 같이 도망갔지 환산으로, 한참을 도망가는데 뒤에서 총소리가 들리더라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이경서씨의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했지만 옅은 고통이 배어 있었다.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환산에서 밤을 새고 다음날 마음을 다잡아 마을로 내려왔다. 국군들의 잠자리를 마련해 준 집안으로 들어서자 가족들이 붙잡혀 있었다. 변명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국군들은 `왜 우리를 죽이려 했느냐?'라며 신나게 몽둥이질만 퍼부었다. 작신 얻어맞고 마당에 앉아 집에서 해 온 아침밥을 먹고 기다리니 군인들은 굴비 엮듯 세 사람을 묶어 골짜기로 끌고 갔다.

"총을 들고 있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말려, 그 때 그 사건으로 비야골에 있던 피난민도 거의 도망갔지."

골짜기로 끌려간 이경서씨는 경사진 비탈면 맨 아래에 꿇려 앉아 천둥소리를 들었다. 그 날 아침 먹은 밥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밥이 될 판이었다. 가운데 앉아있던 유아무씨가 자신에게로 쓰러졌고 유씨를 부둥켜안은 형국으로 그는 바위에 기대 쓰러졌다. 잠시후 군인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다 죽었어?"
"아니 제일 밑에 있는 놈 살았어."

잠시 후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이경서씨는 여기저기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을 뿐 별다른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한참을 숨죽이고 있으니 유씨의 형이 유씨를 부르며 뛰어오르고 가족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골짜기로 들어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긴장이 풀리니까 고통이 밀려오더라구, 그리고 정신을 잃었지."

/다음호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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