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농사 짓는 화가 이영배씨
수박농사 짓는 화가 이영배씨
함께사는 세상[107]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3.07.14 00:00
  • 호수 68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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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입에 멋없는 글씨로 ‘폭풍의언덕화실’이라고 쓴 푯말을 확인하며 그의 화실로 들어섰다. 들어서며 마주치는 것들이 모두 익숙한 것임에도 그곳에서 보았기 때문인지 신선했다. 

한무더기의 돌이 서로 엉키며 기원을 담은 돌탑이 그랬고 그 곁에 수호신처럼 하늘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한 무리의 솟대가 그랬다. 그 곁에 수박밭이 있고, 원두막이 솟아 있었다. 원두막 너머 시선을 멀리하면 대청호 건너 앞뒤로 포개인 채 쉼없이 달려가는 산의 능선이 보였다. 

그의 300여평 남짓한 밭에서는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허수아비가 그럴듯한 포즈로 수박과 방울토마토를 돌보고 있었다. 그 수박밭 한 쪽에는 한참을 올려다 보아야 하는 6m 거구의 선비허수아비가 흰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지팡이를 짚고 이제 막 수박밭으로 들어서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 화가 이영배(48)씨가 그럴듯하게 녹아있었다.

풍경끝에 만난 그를 보며 가진 첫 느낌은 부러움이었다. ‘세상 온 천지를 다 갖는다는게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은 화실을 뛰쳐나와 눈에 보이는 세상을 화폭삼아 자신의 삶과 생각을 마음껏 풀어놓은 그의 삶이 부러웠다.

◆ 겁없이 덤벼든 `수박' 노지재배
“추억을 다시 찾는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무리예요. 어디가서 함부로, 감히 농사짓는다는 얘기는 못하겠어요. 그나마 주위에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이만큼이라도 했지요.” 

대화는 자연스럽게 수박농사 얘기부터 시작됐다. 하우스재배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요즘, 점점 잊혀져가는 추억을 되살리고 싶어 전문가들도 말리는 노지재배에 겁도 없이 뛰어들었고, 그 결과는 예상대로 몸살로 나타났다. 

“농사라고는 태어나서 처음 져보는데요. 이걸 해 보니까 절대로 시장에 가서 농산물 값을 깎으면 안되겠더라구요. 또 더 달라고도 하면 안 되고요.” 

농삿일이 호되긴 했나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원두막 위에서의 대화는 계속됐다. 

“사실 경제적인 목적으로만 농사를 시작한 것은 아니예요. 제 창작활동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작품이 어차피 생활 속에서 얻어지는 거잖아요. ” 

농삿일의 피곤함으로 화실에서의 창작활동은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대지를 화폭삼아 또 다른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원두막 위에서 다시 내려다본 그의 밭은 하나의 거대한 ‘설치미술’이었다. 의연한 기상을 상징하듯 꼿꼿하게 허리를 핀 채 먼 곳을 바라보는 선비도, 밭 한 가운데서 작물을 돌보는 아저씨, 아주머니허수아비도 모두 그의 구상 속에 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소재들이었다. 

“동넷분들도 모두 ‘거참 허수아비 잘 만들었다’ 그러세요. 사실 저 허수아비들에게는 관절도 있어요.” 

그만큼 엄벙덤벙 만든 허수아비가 아니라는 얘길 하고 싶은게다. 창작활동에 쏟아붓는 만큼의 정성은 최소한 쏟아부었다는, 그렇기에 또다른 예술의 연장임을 그는 얘기하고 있었다. 내친 김에 ‘실현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이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꿈도 얘기했다. 환평마을 자체를 솟대마을로 만들고 싶다는 꿈이었다.

◆ 농경의 타작에서 시작된 `난타화'
이 화백이 그림과 인연을 맺은 것은 청년시절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생각을 끄집어내지는 않았지만 잠재되어 있던 욕망을 어쩔 수 없었는가봐요. 결혼을 하고 스무살 중반이 되었을 때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늦게 시작했으니 당연히 대학 등에서 전공을 하진 않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워낙 ‘제도나 규칙' 등에 얽매이는 성격이 아닌데다가 오히려 예술적 잠재력을 가로막는 거추장스러운 방해물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틀을 깨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자유로운 작업환경이 유리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가 옥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전에서 한참 작품활동을 한 뒤였다. 자연을 주요 작품 소재로 삼았던 그가 스케치 활동을 다니며, 혹은 낚시를 하러 다니며 항상 동경했던 곳이란다. 하지만 대도시가 주는 안락함을 버리는데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버린다는 것이 쉽지 않더라구요. 옥천에 온지는 이제 6년째예요. 이 곳에 와서 자연도 제대로 배우게 되고, 그 덕에 저의 예술영역도 많이 확장된 것이 사실이예요. 자연과 교감을 하면서 자연 속에 들어와 자연을 배우는 거죠.” 

자연을 주요 소재로 삼았던 그가 우리의 민속문화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옥천에서다. 그의 화실 초입에 있는 솟대와 돌탑도 그런 관심의 실재적 표현이다. 화폭에 제대로 옮기기 위해서는 직접 작업을 해봐야한다는 생각에서 만들어낸 것들이다. 이런 확장되는 그의 관심은 농경의 ‘타작' 개념을 응용한 새로운 창작기법을 시도하게 만든다. 

곡식을 얻기 위한 행위인 ‘타작’처럼 껍데기를 벗겨낸 진실함을 발견하고 싶었고 이는 붓과 나이프가 아닌 막대기를 이용해 화폭을 두드리는 기법의 시도로 이어진다. 2001년부터 시작된 그의 일명 ‘난타화’는 2002년 전시회를 통해 공개됐다.

◆ 진실을 얘기하고 싶었어요
수박밭과 작업실에 있는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원두막에서 내려섰다. 가까이에 서 본 ‘선비’는 그가 직접 재봉틀을 돌려 만든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서 있는 위세가 당당하다. 밭에 내려서자 원두막에서는 많은 표정을 담지 않은 채 조용조용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하던 이 화백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손짓으로 어른 주먹만하게 자란 수박을 가르키며 “참 예쁘죠?”라고 말하는 이 화백의 표정이 영락없는 어린아이의 표정이다. 밭에서 조금 더 내려가자 조그만 강아지 한 마리가 보초를 서고 있는 그의 작업실과 숙소가 나왔다. 

작업실 앞마당에는 우리의 한 문화로 그가 칭한 ‘멍석’이 놓여 있었고 처마 밑에는 그가 토기를 이용해 직접 만든 새집이 매달려 있었다. ‘행복하게 살으라’는 당부가 적힌 그 새집을 통해 이 화백의 따뜻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축사를 개조해 만들었다는 화실 안으로 들어서자 이젤에 올려져 있는 ‘난타화’에 가장 먼저 눈이 갔다. 

“진실을 얘기해보고 싶었어요. 알맹이를 얻기 위해 농부가 곡식을 두드려 껍데기를 떨궈내듯 가식을 벗겨 내 보려구요. 아직도 좀더 완성해야 될 부분이 많이 남아 있지만요.” 

그는 자신이 화폭에 사용한 색이 ‘오방색’임을 강조했다. 동쪽의 푸른색, 남쪽의 붉은색, 서쪽의 흰색, 북쪽의 검은색, 중앙의 노란색 등을 이용해 우리의 전통성을 표현해 보려는 이 화백의 의도였다. 2∼5mm 두께의 막대기가 만들어낸 오방색의 선들이 서로 어우러져 기묘한 느낌을 준다. 일일이 두드려 만들어 내는 표현이기에 들어가는 수고와 시간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인지 그는 막대기를 두드리는 리듬과 화폭에 부딪히는 소리 등, 그림을 그리는 일련의 작업 전체를 하나의 예술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다. 화실 한쪽에는 멍석을 잘라 화폭으로 삼은 소품도 놓여 있었다. 우리의 전통 민속이라는 그의 예술적 과제를 표현하는 또 다른 형식이었다. 

“다다미가 일본의 한 문화라면 우리에게는 멍석이 있잖아요. 그래서 한 번 시도해 봤어요. 언젠가는 저 멍석을 가지고도 대작을 만들고 싶어요.” 

군북면 환평마을에 위치한 그의 화실과 밭에서는 우리의 전통과 민속을 에술에 접목시키려는 한 화가의 진지한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시 꼭 놀러오라’는 그의 인삿말을 들으며 돌아설 때쯤 누구보다도 치열한 그의 삶을 신선놀음으로 생각하며 막연한 부러움으로 바라본 나의 시선이 ‘사치였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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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16 20:05:35
두번째 있는 사진 설명에 오타있어요. 수바->수박으로 바꿔야 할 듯..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