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에 '흥' 담은 '채' 만드는 '뿌리공예' 손용산씨
가락에 '흥' 담은 '채' 만드는 '뿌리공예' 손용산씨
함께사는 세상 [104]
  • 이용원 기자 yolee@okinews.com
  • 승인 2003.05.02 00:00
  • 호수 6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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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 타악기의 채를 만드는 뿌리공예 대표 손용산씨.

손용산씨가 우리 전통 타악기에 사용하는 각종 채를 만들게 된 것이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에는 그의 고향이 `군북면 막지리'라는 사실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물놀이로 잘 알려진 김덕수씨의 고향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막지리'에 흐르고 있는 `농악의 기운'에 대해 여러 차례 들은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뒤로 막지리에 살고 있는, 혹은 그 곳이 고향인 사람들은 누구나 쇠만 쥐어주면 금새라도 가락을 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던 터였다.

손용산(49)씨는 군북면 막지리가 고향인 `수몰민'이다. 많은 주민들이 그랬듯이 그도 스물 네 살 젊은 나이에 물에 잠기는 고향을 뒤로한 채 내몰렸다. 버티고 버티다 굴삭기에 밀려 짐을 챙겨 대전으로 떠난 것이다. 스무 네 해 동안 고향에서 땅을 일구며 살았던 그였기에 고향을 빼앗긴 대가로 받은 보상금을 없애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른 넘도록 노가다 뛰면서, 사글세방에서 살았죠. 그 때까지 한 것이 농사일인데 뭘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집 앞에 이런 것(북채, 장구채)을 파는 전문점이 있더라구요. 그 가게에 가서 구경도 하고, 얘기도 하고 그러는데 대나무 뿌리를 캐오면 돈을 주겠대요. 한 개에 300원씩, 그래서 그걸 하러 다녔죠."
 
인연이었다. 그 때(80년대 중반)부터 논산, 부여 등지로 장구를 칠 때 쓰는 궁글채(궁채)나 쇠를 칠 때 쓰는 쇠채를 만드는데 필요한 대나무 뿌리를 캐러 다녔다. 아침 첫차로 논산에 가서 대나무 뿌리를 캐고, 막차를 타고 돌아왔다. 처음에는 주머니 사정이 점심도 그냥 건너뛰어야 할 지경이었지만 며칠 다녀보니 중국집에 들어가 자장면이라도 한 그릇 사먹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그 때 에피소드도 많아요. 시골에 가보면 대부분 뜰에 대나무 밭이 많이 있잖아요. 뿌리 캐러 집에 들어가다 개한테 물려 도망간 적도 있구요. 도둑으로 몰려 망신당한 적도 있었구요. `어머님이 신경통으로 많이 아픈데 대나무 뿌리를 삶아 먹으면 좋다고 해서 이렇게 왔다'구 거짓말도 해보구요.(웃음) 시골에 가도 대문 멋지게 해 놓은 집은 인심이 고약해요. 대충 얼기설기 대문 해놓은 집은 점심도 챙겨주고, 물 인심도 좋고 그렇드라구요."
 
때로는 있지도 않은 어머니의 신경통 얘기를 지어내야 했지만 대나무 뿌리를 캐러 다니는 일이 수입은 괜찮았다. 하루에 200개를 만들어 오면 6만원 수입은 되었으니 당시 돈 값어치로는 제법 짭짤한 수입이었다.
 
그렇게 대나무 뿌리를 캐러 다니다가 직접 제작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겼고 아내 전관순(43)씨와 가내수공업으로 집에서 채를 조립 생산하기 시작했다. 50%가 남는 장사였으니 부가가치가 꽤 높은 장사였다. 모든 원재료를 납품 받아서 단순 조립만 하던 것이 머리부분부터 대까지 직접 만들어 조립·납품하는 것으로 진화했다.

■북장이의 생생한 증언 '채만들기 적용'
"손재주가 어디있어요.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삽하고 호미를 쥐고 땅만 팠는데요.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모양만 흉내를 냈어요. 그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몇 번을 만들어보고 잘못되면 다 버리고, 그런 과정을 반복해서 여기까지 온 거죠."
 
길이를 맞추지 못하고 채의 꼬리와 머리 부분의 무게가 적당하지 않으면 채가 날리거나 제대로 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일이 무게를 달아 손잡이 부분에 헝겊을 감았지만 지금은 재단되어 있는 가죽을 감기만 하면 적정한 균형이 잡힌다.
 
"제대로 된 채를 만들려고 많이 돌아다녔어요. 농악이나 풍물 공연이 있는 곳도 찾아다니고 절이나 굿판도 다녔죠. 계룡산 같은 데서 대제가 한 번 열리면 전국의 무당들이 다 오거든요. 제물로 소를 잡을 정도니까요. 그 곳에 가서 사진도 찍고, 무당을 만나 얘기도 하죠. 내가 가져간 채를 주고 평을 듣기도 하구요. 풍물을 치는 목적에 따라 채도 달라야 해요. 그것을 이해하려면 많이 보고 들어야지요."
 
손용산씨는 이렇게 현장에서 듣는 쇠잡이, 장구잡이, 북잡이들의 증언을 `채 만들기'에 적용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머리 중앙 부분이 봉긋 올라온 그만의 `쇠채'가 만들어졌다. 박달나무대신 좀더 단단한 `탱자나무'를 사용한 이 쇠채는 대나무뿌리를 머리 중앙에 좀더 깊숙이 박을 수 있어 잘 빠지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다. 오래 사용해도 쉽게 조각이 나지 않는다.
 
이 쇠채는 `특허품'이기도 하다. 손용산씨는 이외에도 2가지 특허기술에 대해 심사를 받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채의 머리 부분을 깎는 공작용 쇠칼을 직접 디자인해 만들어 낼만큼 기술적 노하우도 충분히 쌓였는데 그가 처한 사업적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중국산 60%가량 장악, 최고품은 우리것
"이쪽 분야도 중국산이 밀려들어서 많이 힘들어요. 가격경쟁력이 없으니까요."
손용산씨의 손을 거쳐 `뿌리공예'에서 나오는 채는 대략 20종 내외다. 한때 북, 장구 받침까지 만들 때는 전국 유통량의 60%가량을 장악했지만 현재는 최고급품 쪽에서 30% 정도의 시장 장악력을 갖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래도 우연히 들어선 `채 만들기'에 그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간혹 공연을 보러 갔을 때 내가 만든 채로 연주하는 프로들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쁜데요. 간혹 가져간 채를 선물하면 `아∼ 뿌리공예요! 잘 만들죠.'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때가 보람이죠. 텔레비전에서 가끔 공연을 보여 줄 때 내가 만든 채가 눈에 띄는 것도 좋구요."
 
대학교 2학년생인 손씨의 큰딸 가연(22)씨는 대학 풍물패에 들어가 풍물을 치고 있다. 손씨의 권유로 시작했지만 본인도 학교에 갈 때 장구채, 북채, 쇠채를 한 웅큼 집어 갈 정도로 만족하고 있단다.
 
"작은 딸은 별 관심이 없는가 봐요. 고등학교 3학년이라 바빠서 그렇겠지만 본인도 별 생각이 없데요."
큰딸 가연(22)씨와 작은딸 나연(19)양의 얘기로 손용산씨와의 대화는 마무리되어 갔다.

■고향의 향수 머금은 풍물가락 담아내려 노력
그의 `뿌리공예 작업장'은 막지리가 한 눈에 보이는 대청호 건너편 군북면 소정리 선착장 부근에 있다. 집이 있는 대전에서의 생활보다 이 곳 소정리 선착장의 하우스 안에 있는 시간이 더욱 많다.
 
"지금도 건너다보면 어릴 때 닭서리, 감자서리 하던 일이 떠오르죠. 살기는 힘들었어도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고향에 대한 얘기는 항상 아련한 향수를 머금은 미소를 짓게 하나보다. 25년 전 굴삭기에 떠밀려 고향을 등졌던 손용산씨는 지금 고향이 훤히 건너다 보이는 곳으로 돌아왔다. 가슴과 머리에 우리의 풍물 가락을 한 가득 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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