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에 내던 조세가 폐지되다
왕실에 내던 조세가 폐지되다
[오늘의 역사]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옥천(8) <3월16일∼3월22일>
  • 이안재 기자 ajlee@okinews.com
  • 승인 2003.03.21 00:00
  • 호수 6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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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16년(1521년) 3월21일
[옥천, 청산 등지에 우박이 내리다]
이날 옥천과 청산을 비롯한 청주, 황간, 진천, 단양 등 충청도 지방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 강원도, 경기도에 이르기까지 우박이 내렸다.

◆숙종 20년(1694년) 3월22일
[궁가에서 옥천 땅의 절수한 것을 폐지하게 하다]
이날의 숙종실록에는 옥천 땅의 절수(折受·국가로부터 일종의 토지소유권 증명서인 입안(立案)을 발급받거나 전조(田租·논밭에 대한 조세)의 수조권(조세를 받을 권리)을 지급받는 행위를 말한다)한 것을 폐지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여러 도의 각 고을로 하여금 여러 궁가(宮家·국왕과 세자를 제외한 왕실의 직계가족을 말한다)의 절수가 얼마인지를 헤아려 의정부에 이것이 적당한 지를 물어 일정한 체계를 갖출 것을 임금에게 요청했다.

이에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옥천 것에 대해서만 폐지하기를 명했다. 이후 여러 번 청하자 그제서야 정지시켰다는 기록이다. 이는 조선시대 왕족들이 각 지역마다  토지를 받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일정한 토지에서 세금을 거둬 들일 수 있는 권리를 주었는데 옥천을 대상으로 처음 이를 폐지했다는 기록으로 보인다.

◆경종 2년(1722년) 3월17일
[옥천인 육 현을 잡아 가두고 박살하다]
이 실록에서는 옥천 사람 육 현(陸 玄)을 포도대장 이홍술이 잡아 가두고 때려 죽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육 현이란 사람은 술수를 가지고 사대부들과 사귀다 일찍이 김창집이라는 사람의 집에 손님으로 묵은 적이 있으며 이를 핑계로 경자년(1720년) 포도대장인 이홍술이 육 현을 잡아 가두고 죽였다는 기록이다.

이에 육 현이 김창집의 집에 드나들면서 은밀한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김창집이 이홍술 및 포도청 군관인 현덕명 등을 사주해 죽였다는 말이 나왔다고 실록은 전한다. 

의금부에서는 이에 따라 현덕명을 신문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자백을 받을 것을 요청하고 임금이 이를 허락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옥천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는 조선왕조실록 세종 편에 나타난 지리지다.

◆옥천의 연혁-이 지리지에는 옥천을 본래 신라의 고시산군(古尸山郡·고시산군이란 지명은 한자 그대로 시체가 산처럼 많이 쌓여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겠는데 백제어 연구를 하는 충남대학교 도수희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세월이 흘러 지역을 표기하면서 원래 지명인 고리산을 잘못 표기했다고 주장하고 관성-옥주-옥천에 이르는 어원은 신라의 서쪽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고리산이란 지명이 정당성을 갖는다고 밝힌 바 있다)인데 경덕왕이 관성군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 9년에 경산부에 붙였다가 인종 21년에 비로소 현령을 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충선왕 때 지옥주사로 승격, 이산(利山)·안읍(安邑)·양산(陽山) 등 3개 현을 소속시켰고 조선 태종 때에 옥천군이라고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구 및 관할지역-당시 호수는 558호였고 인구는 1천834명이었다. 이는 오늘날의 청산·청성이 옥천군에 속해 있지 않은 탓에 이 지역을 제외한 지역으로 생각해야 한다. 즉 오늘날의 옥천읍, 동이, 안남, 안내, 이원, 군서, 군북면과 영동군 양산면 등이 관할 지역이었다.

◆성씨-토착성씨는 육(陸)·황(黃)·전(全)·신(申)씨이고 들어온 성씨가 김(金)·전(全)·유(柳)씨 등 3개 성씨, 촌성(村姓)은 표(表)씨라고 기록하고 있다. 안읍(안내, 안남)의 성은 송(宋)·주(周)·장(張)·맹(孟)이고 없어진 성은 강(康)·종(鐘)씨였다. 양산의 성씨는 명(明)·장(張)·박(朴)·백(白)·이(李)·심(沈)씨이다. 이산(이원면)은 박(朴)·방(房)·임(任)씨가 있었고 촌성(村姓)이 전(田)씨다. 심(沈)·김(金)·한(韓)씨는 없어졌고 속성(續姓)은 김(金)씨였다.

◆토산물 등-땅이 메마르고 기후가 차고 더운 것이 알맞고 풍속은 검소한 것을 숭상한다고 적었다. 개간해 만든 밭이 4천178결(結·조세를 셈하기 위한 논밭의 면적 단위. 백 짐 또는 만 파(把)를 일컬음)이고 오곡과 뽕나무, 산뽕나무가 난다고 적고 있다. 또 토산으로 나는 공물은 여우가죽, 살쾡이가죽, 대추, 호도, 지초, 꿀, 밀(황랍(黃蠟)·벌집을 뜨거운 물에 녹여 틀에 넣어 굳힌 물질)·석이(깊은 산의 바위 위에 나는 5∼10cm의 석이버섯으로 맛과 향기가 좋아 먹었음)·느타리·종이·칠(漆·옻)이 났고 약재는 북나무진(안식향나무의 껍질에서 나는 진액, 훈향료·방부제·소독제로 쓰임)·복령(담자균류 구멍장이버섯과의 버섯. 공 모양 또는 길둥근 모양의 덩어리로, 땅 속에서 소나무 따위의 뿌리에 기생함. 한약재로 쓰임)·승검초뿌리(당귀, 보혈·강장제·진정제로 쓰임)·인삼·애기풀(원지과의 여러해살이풀. 산지에서 나는데 뿌리는 가늘고 단단함. 봄에 자줏빛 꽃이 피고 잎줄기는 보정장양제로 쓰임)·영양뿔(영양의 뿔, 산양)·모란뿌리껍질이다. 신감초(辛甘草·당귀)도 토산이다. 군의 서쪽 금이산(金伊山)에 1개의 도기소가 있다고 전하고 있다.

◆성(城)-성황당산성(城隍堂山城·서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분석)이 군의 서쪽 4리에, 이원면 평계리와 영동군의 경계에 있는 마니산석성(摩尼山石城)은 군의 남쪽 27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驛)-공무를 수행하는 관리들이 쉬어가는 곳이었던 역은 증약(현재 군북면 증약리)·가화(옥천읍에 위치한 역으로 예전에는 신역(新譯)이라고 했다고 전하고 있다)·화인(안읍, 현재의 안내면에 소재)·순양(현재 영동군 양산면 소재)·토파역(현재의 이원에 있었던 역) 등 5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봉화(烽火)-이원면에 있는 월이산(月伊山·이산현의 동쪽에 있는 것으로 남쪽으로는 영동의 박달라에 북쪽으로는 환산(고리산)에 응한다고 썼다)과 군북면 고리산(환산)에 있는 환산(環山·회덕의 계족산에 응한다고 기록)은 군의 북쪽에 있다라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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