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을 사랑하는 건실한 '기업인'
청산을 사랑하는 건실한 '기업인'
[내고향 옥천] 대성기업주식회사 대표 박병수씨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3.02.28 00:00
  • 호수 6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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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면 명티리 출신 박병수씨
‘팔음산’, ‘벼락바위’, ‘머루와 다러, ‘예곡초등학교’ 등 그에게서 나온 고향의 언어들은 따뜻한 여운과 파장을 안겨주며 고향 속으로 그를 빨려들게 했다.

기억의 그물로 길어 올린 그의 고향 얘기들은 매달 모이는 대전 청우회 모임에서 되새김질되고, 친구들의 얘기와 씨줄날줄로 엮어가면서 즐겁게 확장되고 있었다.
 
공주시 우성면에서 건설자재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대성건설 대표 박병수(55)씨, 현재 고향에 뚜렷한 연고도 없고 나온 지 40여 년이 넘었지만, 청산면 명티리 그 ‘요람’에서의 기억은 더없이 값진 것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 대에는 강원도 횡성에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정감록을 살펴보시고서는 전쟁이나 재난을 피하려면 충청도 지방으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아버지가 1948년도에 이쪽으로 이사 오셨지요. 명티리에서 예곡초등학교(13회)와 청산중학교(15회)를 졸업하고 청산고등학교 2학년 다닐 때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대전으로 건너왔어요.”  그가 되새긴 추억은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추억 하나. 
당시 집에서 예곡초등학교까지는 십 리, 청산중학교까지는 이십 리였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여럿이 다녔는데,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혼자 걸어다니다가 삼방리와 명티리 사이 인적도 드문 그 곳의 벼락바위에서 부엉이가 울면 공포감이 밀려들어 집까지 얼른 내달리곤 했다.
 
추억 둘. 
마을 뒷편 팔음산에 올라가 커다란 바구니에 머루, 다래 등을 잔뜩 따다가 질리도록 맛나게 먹었다.
 
추억 셋. 
당시 초등학교 동창인 곽윤성씨는 웅변을 잘했고, 박길만씨는 글짓기를 잘했고, 난 수학을 즐겨해 군 경시대회도 나가고 그랬다. 그런데 어릴적 특성에 맞게 곽윤성씨는 군 환경수질과장으로 재직중이고, 박길만씨는 청주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숫자를 좋아했던 나는 장사꾼으로 큰 것 같다.
 
그 추억들은 20여년 가까이 두 개의 청우회라는 모임을 가지면서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청산중학교 동기모임인 청우회는 10명 정도 회원이 되고, 부여조폐창장하는 유창길이가 회장이고, 여자회원들도 있어요. 그리고 중학교 선후배 모임인 청우회는 박인수 내과원장(후배), 보안사에 있는 민경철 선배, 경찰서장을 하고 있는 후배 김광성, 근대화연쇄점을 하는 송서호 선배 등도 있습니다. 청산에서도 모임을 갖곤 하는데, 청산의 원종호씨 박양선씨, 설용학씨, 김동원씨 등도 제 친구들이에요.
 
그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홀홀단신으로 대전으로 넘어와 16살 때부터 벽돌제조공장에서 점원을 하면서 지금까지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한 우물을 판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세월이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워낙 바쁘게 살았어요. 그리고 다른 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라구요. 돌아다니며 흙 묻히고 하는 일이 좋아서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93년도에 대기업 못지 않게 키워놓은 회사를 대기업에 매각하고, 97년도에 공주에서 다시 사업을 시작하여 현재는 4만3천평 규모의 대규모 농공단지를 지으면서 사업을 조금씩 확장해 나가고 있다고 했다. ‘대성’이라는 회사에서 처음부터 일했고, 지금까지 ‘대성’이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있는 그는 심지어 아들에게도 ‘대성’이란 이름을 물려줬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일과 자식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지었단다.
 
회사 사장이란 직함에 걸맞지(?) 않게 7년된 중형차와 구닥다리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는 그가 흙을 잔뜩 묻힌 채 나타났을 때의 첫인상이 빗나가지 않았다. ‘성공’이란 말을 붙이기엔 아직 이르고 할게 많다는 그는 일에 지독히 빠져 있는 건실한 중년 기업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고향냄새가 덧붙여져 따뜻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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