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몰된 옛고향 아쉽지만 자부심 잊지 않아'
'수몰된 옛고향 아쉽지만 자부심 잊지 않아'
[내고향 옥천] 충남지방경찰청 감찰계장 조영수씨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3.01.30 00:00
  • 호수 6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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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읍 동정리 출신인 조영수씨

하이얀 잔모래가 길게 늘어선 백사장이 있던 풍경, 그 곳에서 해떨어지는 줄 모르고 멱감다가 엄마한테 혼나던 생각. 시간의 수레바퀴를 좀 더 돌려보면, 공짜버스나 자전거 타고 다니던 중학교 시절도 떠오른다.

오대리로 배타고 건너갈 때는 강바람이 매섭다고 엄마가 앞치마로 포근하게 감싸주던 기억도 아련하게 살아난다.

“그 때는 저기 강 건너 오대리 넘어 피실까지 엄마가 목화씨를 얻으러 가곤 했어요. 늦게 오는 엄마 마중 나가러도 갔었고요. 원래 창녕조씨 집성촌은 오대리에서 2-3Km 더 가서 버들개라는 곳이라고 들었죠. 아버지는 버들개 태생이에요.”

계속 기억을 되감는다. 

“내가 경찰이었기 때문에 수몰민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내가 사는 동정리가 수몰됐을 때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던지. 다른 곳에서 철거민이나 수몰민을 접할 때 그래서 고향사람들 생각이 나요.”

그의 추억은 꼬리를 물고 끊어질 듯하면서 되살아났다. 옥천읍 동정리 출신 조영수(50) 경정은 현재 충남지방경찰청 감찰계장이다. 죽향초 55회, 옥천중 18회, 옥천공고 21회 등 꼬박 초중고 학창시절을 옥천에서 꽉 채운 후 그는 전경으로 군입대를 했다.

그것이 지금의 시작이었다. 군에서 제대 후 76년 순경으로 들어간 그는 계속 시험을 보며 지금의 경정까지 승진했다. 

“집안도 어려웠을 뿐더러 전경생활을 하면서 경찰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어요. 무엇보다 공부 열심히 하면 시험 승진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저에게 큰 선택의 동기로 작용했어요. 참 바지런하게 살았죠.”

그는 경찰이 된 동기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적성이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맞춰가며 이젠 경찰이라는 옷이 편하다고 했다. 

“새마을 지회장 하는 곽균상, 옥천밧데리 하는 김세경, 구읍에서 물류업하는 김성진, 지영꽃집의 방승춘, 군서면 오동2리에서 산양유 사업을 하는 김재근 등 친구들이 많아요. 그 중 몇몇은 일팔회(옥천중 18회)라고 해서 매월 첫째주 월요일 7시쯤 대전 인동부근에서 만남을 가져요. 아직도 친구들 만나면 좋죠.”

고향 동정리에는 조영수씨의 어머니 최규엽(73)씨가 산다. 

“친구분들하고 마실가며 그렇게 노년을 보내시는 것이 즐거운가 봐요. 대전으로 모셔 오려고 했는데, 오랫동안 뿌리를 내려온 환경이 바뀌면 안좋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자주 찾아뵈려고 노력하는데, 경찰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자주 찾아뵙지도 못합니다.”

동정리는 앞서 그렸던 것처럼 햇볕이 가득한 따뜻한 동네였다. 하지만, 수몰 이후 산 근처로 옮기면서 짙은 응달이 드리워져 마을의 옛모습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당시에는 동정리가 안터, 남곡리, 지양리 등 8동네로 갈라지는 길목이었어요. 이발소가 한 때는 세 개나 있었고, 조그만 장도 섰으니 나름대로 번화가였죠. 그 생각도 나네요. 마을에 전화가 없어서 유일한 통신 수단이 군동초등학교 숙직실 전화였어요. 급한 일 있으면 사정해서 그 전화 많이 애용했죠. 현재 조영창 이장이 하는 슈퍼 앞에는 퍼펏(폭포)거리라고 해서 물이 줄기차게 쏟아졌어요. 한 여름에 그 후미진 곳에서 조용히 누워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었는데..”

옥천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는 조씨는 고향이 계속 발전하고, 고향사람들도 다 잘 돼 옥천출신이라는 것이 계속 뿌듯하게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쳤다. 자신도 옥천 출신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살고 있다면서. 

취미 생활로는 20년째 조기축구를 계속 하고 있고, 슬하에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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