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발전에 대한 고민이 저의 젊음이었습니다"
"농촌의 발전에 대한 고민이 저의 젊음이었습니다"
[내 고향 옥천] 군북면 막지리 출신 박창하씨
  • 황민호 minho@okinews.com
  • 승인 2002.08.15 00:00
  • 호수 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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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대한 열망과 농촌의 발전에 대한 고민이 저의 젊음이었습니다"

박창하(66·대전시 서구 탄방동)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묵혀놨던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놓은 필름을 펼쳐 파노라마같은 영상을 재생하듯 어린 시절의 고향에서의 기억들을 길어 올렸다. 군북초등학교 10회 졸업생, 폐교가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학교의 기억은 그를 상념에 젖게 했다.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부터인가 중학교 진학을 할 사람은 선생님 댁에 6∼7명씩 모여 보충 공부를 더 했지요. 당시 아버님이 일본에 계셨고,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어요. 그런데 배우고 싶은 열망은 억누를 수가 없더라구요. 초등학교 졸업하고 1년 동안 집에서 일 도와주다가 대전에 가서 가양고등공민학교에 다시 들어갔어요."

그는 향학열이라고 표현했다. 다시 집에 돌아와 3년 남짓 농사일을 도우면서 당시 옥천농고 2학년이었던 박근하(72)씨에게서 책을 빌려 그야말로 주경야독을 했다고 말했다.

"중학교 때 배우던 책들을 빌려 새벽 2시까지 국문해독이니 수학, 역사 등을 틈틈이 공부했어요. 박근하씨가 고등학교 시험을 응시해보라고 해서 응시한 끝에 옥천농고에 들어갔죠. 맨 처음엔 기초가 없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죠. 그래도 열심히 해서 충남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시험 운과 사람 운이 좋다고 했다.
"충대 재학시절에는 김영목 교수님이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주셨고, 계속 공부하다가 농민교육원(현 농촌진흥원)에 들어가게 된 거죠" 천안의 4H 연수농장에 있으면서 농촌개량과 개발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이는 지역에 와서 많은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자신들의 일부 토지를 농로를 이용하는데 써야 했기 때문에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농로 확장을 하는 등의 실천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대학교 2학년 때는 지역에 와서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을 운영하는 등 `어떻게든 농촌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하에 물불없이 뛰었다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전 군의장이었던 유제구씨와 국민학교 동기라며 유씨가 이번 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후배들에게 물려준 것이 잘 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고향에는 현재 연고가 없지만 선친들의 묘소가 있어서 1년에 세 번 정도 찾아가 본다고 했다. "수몰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던 마을 주민들 다시 만나자고 4월하순부터 5월초순 사이 한 날을 잡아 `막지 대동회'를 하는 데 그 날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예전 막지리 사람들이 모여 고향 얘기를 많이 하죠. 그 날은 꼭 찾아가요."
 
얼마 전 농민교육원에서 은퇴를 한 후 서예와 문인화에 취미를 붙이고 여전히 배움에 대한 열망을 채우고 있다. 한쪽 벽에는 보훈처에서 주관한 전국단위 서예대전에서 은상을 수상한 작품이 걸려있고, 벽면마다 은은한 문인화가 집안에 향취를 돌게 한다.  화훼에도 관심이 많아 나무나 꽃 등을 이웃에 분양을 해주며 이웃사랑도 몸소 실천하는 그가 말했다.

"계속 열심히 살아야죠. 막지리 사람인 것을 부끄럽지 않도록 새로 정착한 대전에서도 남은 인생 맛깔나게 살 작정입니다." 보리가 잘 자라기 쉬운 땅이라 `맥기'에서 유래되었다는 막지리, 박씨는 2시간 남짓 옛 막지리의 생활을 회상하며 고향에 대한 향수를 어루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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