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을탐방[73] 군북면 석호리 -진걸마을-
신마을탐방[73] 군북면 석호리 -진걸마을-
청풍명월의 고장 진걸마을을 찾아서...
  • 황민호 기자 minho@okinews.com
  • 승인 2002.08.15 00:00
  • 호수 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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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자 할머니가 비가와서 콩이 썩는다며 밭에서 콩을 따와 껍질을 벗기고 있다.

석호리란 푯말을 따라 미끄러지듯이 빨려 들어간 후 ‘롤러코스터’를 타듯 꼬불꼬불하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연이어진 그 길 위에 한참동안 머물러야 했다. 방향을 바꿀 수 없을 만큼 좁은 차로를 따라 어쩔 수 없이 그 길이 가리키는 종착지까지 가야만 했다. 구렁이가 마치 산을 타듯 산등성이를 싹 훑고 도착한 그 곳엔 푸른 물이 넘실대는 강이 있었고, 그 어귀에는 몇 채 안 되는 집들이 강을 굽어살피고 있었다. 군북면 석호리 진걸 마을, 또는 도호리라고 했다.

▶할머니와의 첫 만남
땅을 흠뻑 적실 만큼 내린 비는 아직도 촉촉하게 마른 회색 콘크리트바닥을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다.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구부정한 할머니, 조그만 주머니를 왼 손에 움켜쥔 채 지팡이를 길동무 삼아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할머니 어딜 갔다 오시는 거에요?”
 
“저기 고개 너머 밭에 호박따러 갔다 오는겨” 낮선 이의 물음에 친근하게 답해주는 할머니의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하다. “진걸 마을 어떤 마을이에요”  “어떤 마을이긴, 수몰돼서 예전 사람들 다 이사가고 이제 늙은이만 몇 남았어”
 
저기 멀리 아이들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고, 뛰노는 모습들이 빗줄기에 가려 환영처럼 느껴진다. “저 아이들은 누구에요”  “8남매 딸부잣집 애들이야. 지금 둘은 일하러 나가고 여섯이 아마 학교 다니지” 박정림(81)할머니. 몇 년 전부터 허리가 아파 몸 가누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는 할머니는 마을에 대한 많은 것을 암시한 채, 다음 이야기의 상대로 대나무집 식당 주인이자, 이 마을 반장 손학수(53)씨를 지목했다.

▶대나무집 식당 이야기
마침 들른 식당 안에는 대전에서 붕어찜을 맛보러 온 손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깔끔한 것보다 약간은 친숙하고 고향 냄새나는 이곳이 좋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맛이 기가 막히거든. 맛없으면 일부러 여기까지 오나?”  손님들에게 듣는 찬사. 손씨의 얼굴이 밝아진다. 한쪽에는 이웃 할머니인 조예분(74)씨가 부지런히 그물 손질을 하고 있고, 손씨 부인 천경희(44)씨도 분주히 움직인다.
 
“가구는 15가구인데 한 집은 비어 있고, 7가구는 혼자 살고, 두 내외가 있는 집이 6가구, 아이들 여섯 있는 집이 한 가구 도합 스물 여섯명이네요”  인구 셈이 간단하다. “손씨가 다섯 가구, 육씨, 태씨가 한 가구. 여기가 원래 밀양 손씨 세거지에요. 저기 딸부잣집 손동철씨와 나만 고기잡고, 나머지는 텃밭에서 일하면서 소일하고 있어요” 마을의 윤곽이 대강 잡혔다. 이 마을 반장을 맡고 있는 손씨는 유일하게 마을에서 자동차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가끔 마을 사람들 나들이에 이용하기도 한단다.

군대가려고 올 봄에 휴학한 아들이 집에 와있어 손씨는 흐뭇한가 보다. “이 녀석 대학 갈 생각 없다더니 갑자기 방송 연예과 간다고 갔지 뭡니까?”  연극배우를 꿈꾸는 노란머리 광인이는 대나무집 식당의 자랑이다. 얼마 전 연극동아리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을 성공적으로 공연했다는 광인이. 그의 몸짓과 말에서 그리고 표정에서 진걸 마을의 냄새가 밸 수 있기를 꿈꿔봤다.

▶ 8남매 딸 부잣집
아이들이 있는 마을은 생기가 넘친다. 젊은이가 있는 마을은 활력이 넘친다. 노인이 있는 마을은 안정돼 보인다.  평온해 보이는 마을의 침묵을 와장창 깨뜨린 것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였다. 8남매 딸부잣집 손동철(49)씨 네였다. 창고에 가보니 손동철씨 내외와 넷째딸 정민이가 함께 그물 손질을 하고 있다. 내일 새벽에 고기를 잡으려면 오늘 오후에 미리 그물을 쳐놔야 하기 때문이다. 창고 안에 웅웅 울리는 라디오 소리와 은근히 코를 괴롭히는 민물고기의 냄새, 묵묵한 손씨의 몸놀림, 시골 어부의 체취가 느껴졌다.
 
손씨는 담배 농사와 고기잡이 두 가지를 한다. 담배 농사가 손이 많이 가고 힘이 들지만, 그나마 일정한 수익을 보장하는 계약농사이기 때문에 손을 놓을 수가 없단다. 방 안에는 어느새 아이들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있다. 정은(죽향초 5), 은진(죽향초 3), 정환(죽향초 2), 원섭(7)이 넷이서 장난을 하며 TV를 보고 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일곱째, 여덟째 정환이와 원섭이 이 두 녀석을 보니 왜 8남매인지 단박에 이해가 갔다.
 
손동철씨의 걱정은 아이들의 통학문제이다. 막지 선착장까지 데려다 준 후 버스를 타고 통학해야 하며, 더욱이 아이들의 하교시간이 다 틀려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려서 데려오는 수밖에 없다. 중학생 정민이와 고등학생 정순이에게 휴대전화를 마련해 준 것도 이 때문이다. 겨울이라도 될라치면 그 어려움은 더하다. 조그만 셔틀버스라도 운행을 한다면 아이들 통학걱정은 덜 수 있을 텐데. 이 고민은 비단 손동철씨 만의 것은 아니었다.

▶수몰과 더불어 고립
아름다운 강변, 천혜의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던 대청호 주변 마을의 꿈은 댐 건설로 사라져 버렸다. 수몰로 인해 없어진 것은 그 뿐이 아니었다. 마을이 물에 잠겨 그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고, 군북면의 중심이었던 함티, 진걸마을, 석결리, 막지리 등은 순식간에 변방으로 밀려났다.
 
현 의회사무과장으로 있는 진걸 마을 출신 손채화씨의 증언에 따르면 함티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마을이 번성했으나 수몰이 된 후 마을의 좋은 땅이 물에 잠겨 현재는 몇 가구만 마을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함티의 경우 마을 자체가 사라졌고, 용호리는 현재 8가구만 남았으며, 60가구까지 있었던 진걸마을의 규모는 현재 15가구로 축소되었다.
 
현재 마을 주민의 이동수단은 택시다. 돈이 많아서 택시를 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마땅한 교통수단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장에 가서 물건을 살 때마다 택시를 부른다. 택시기사와 합의한 가격 8천원을 내고 보통 5명이 탄다. 진걸 마을 할머니들은 장에 갈 날짜를 정하고 누가 갈 것인지 미리 상의한다.  “보통 아침에 타고 가서 장을 보고 읍내 고무신 집에서 모여 다시 차를 타고 들어와.”
 
“셔틀버스 하루에 세 번 정도만 온다면 좋지. 아침, 점심, 저녁 시간만 왔다 가면, 아이들 학교 통학하는데도 쉽고, 늙은이들 장 보는데도 한결 수월하지”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람이 얼마 살지 않아서 그게 쉽지 않다는 걸 안다고 덧붙인다. “그러면 돌고리까지라도 오면 걸어가서 탈 수 있지” 김씨는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다시 거리를 적당히 양보한다.

소수이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혜택, 여기서도 효율과 경제성에 대한 고려는 불편을 겪고 있는 주민들이 우선 내세우는 얘기다. 그만큼 그런 생활에 익숙해진 탓일까? 오지에 사는 주민이 군의 관심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소속감을 과연 경제적인 것들과 맞바꿀 수 있을까?

▶마을 이름의 유래
진걸마을, 도호리 모두 이 마을의 지명들이다. 질그릇 도에 호수 호를 써서 청풍가든에 사는 김학열씨의 경우 옛날 커다란 질그릇 화로가 이 마을에 있어서 붙여졌고, 진걸이란 이름도 질그릇의 변형된 말이 아닌가 추측해 보기도 했다. 김춘자씨는 산과 강으로 둘러 쌓여 밖으로 나가기 ‘징글맞다’ 하여 진걸 마을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했다.
 
손채화씨는 진걸 마을의 땅이 다른 땅보다 질어 흙이 검고, 마을 앞에 늪이 있었다며 질척한 땅에서 유래된 말이 진걸이 아니냐는 의견도 내보였다. 손씨는 덧붙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중인 ‘옥천군지도읍지’를 복사했다며 증걸(더할증, 호걸걸로 등장한 마을이름은 정확히 무슨 뜻이 담겨있는지 손씨도 알지 못했다)이란 명칭을 보였는데 이것으로 보아 마을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상당히 역사가 깊은 마을이라 설명하기도 했다.

▶청풍정과 명월암에 얽힌 전설
청풍명월이라. 달 밝은 밤에 부는 푸른 바람. 그 장소의 원조를 찾았다. 석호리란 푯말을 보고 들어서서 한참을 휘돌아나가다가 나타난 두 갈래길. 한쪽은 석호리의 한 마을인 돌고리(석결리)로 가는 방향이었고, 바로 맞은편 이정표에는 청풍정이란 말이 씌어 있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정표는 그뿐이었다.
 
한참을 가보아도 구체적인 이정표를 놓치고 한참 오가기를 반복하다가 ‘청풍 가든’이란 푯말 사잇길로 들어갔다. 식당 사잇길로 빠져 나가면 나온다고 ‘청풍가든’에서 나온 김학열(77)씨가 설명해준다. 같이 동행하면서 설명을 해주는데, 95년부터 공사를 시작, 96년에 복원돼 홀로 강바람을 맞고 있는 청풍정이 외로워 보인다. 별다른 진입로 없이 방치되다시피한 문화재, 세월의 더께만 덧씌워진 이 정자는 바로 옆 명월암만이 지켜봐 주는 것 같다. 청풍정과 명월암. 어떤 사연이 있을까?

군청문화유적답사동호회에서 만든 문화유적답사기에 소개된 내용을 보면 명월암은 1884년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키다가 삼일천하로 끝을 맺고, 옥천의 청풍정이란 정자에 내려오면서부터 그 전설이 시작된다. (손채화씨는 김옥균이 갑신정변 실패후 바로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청풍정에 내려올 시간이 없었다 추측하고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전의 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문화유적답사기에서 밝혔다) 청풍정이란 정자에서 명월이란 기생을 데리고 내려와 울분을 달래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을 때, 명월은 김옥균이 자신의 야망에서 자꾸만 멀어지려 하자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 생각하며 스스로 몸을 강물에 투신, 김옥균의 재기를 바랐다고 한다.
 
김옥균은 명월의 자신을 생각하는 이런 애정을 잊지 못하고, 바위에 명월암이란 이름을 새겨 명월이를 기렸다고 한다. 이런 가슴 저미는 로맨스 뒤에는 냉혹한 실사도 스며 있다. 명월암에 대한 전설이 구전되어 내려오는가 하는 반면에 김옥균의 실제 본처에 대한 이야기는 야사와 수기를 통해 드러나 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김옥균의 본처 유씨는 갑신정변후 자결하려다 선조의 묘소가 있는 옥천에서 7세된 딸과 하인의 신분으로 살았다’라고 손채화씨는 다른 문헌을 이용하여 문화유적답사기의 내용에서 밝히고 있다.  청풍정이 있는 옥천은 김옥균과 명월이의 애절한 로맨스를 보여주지만, 또 다른 옥천은 김옥균의 야망에 희생된 본처의 애닮음을 담고 있기도 한 것이다.

▶취재를 마치고...
저기 강 속에 수몰된 마을이 있으려니 생각하니 한 쪽 가슴이 편하지 않다. 굳이 옛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그 수려했던 풍경들이 물 속으로 투영되어 마음속에 그려진다. 댐으로 상징되는 문명의 이기는 사실상 자연마을의 일부분을 동강냈다. 격세지감! 흐르는 시간은 추억을 파묻고 전설 속으로 줄달음한다.

아직까지 마을을 지키는 주민들. 이들이 저 너머로 사라져 간다면 그 옛날 아름다웠던 모습들은 누가 증언해줄까? 수몰되어 졸지에 오지가 되어버린 마을은 이래저래 슬프다. 그나마 고개를 휘감으며 닦아놓은 도로에는 버스 하나 다니지 않고, 마을 인근의 복원한 문화재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가꾸지 않은 문화재는 하염없이 흐르는 세월에 삭아간다. 바위에 음각된 명월암이라는 글씨에는 외로움이 절절히 배어 있고, 청풍정의 몰골은 푸름이 아닌 잿빛을 띤다.

탯줄 끊듯이 끊어 놓을 심산인가? 거기에 아직 그들이 살고 있다. 이제 학교를 들어갈 마을 막내둥이 원섭(7)이가 있고, 강가에 얼룩백이 황소를 데리고 다니는 마을의 최고령자 손강년(85)씨가 그 곳에 산다.  진걸 마을에서 본 두 가지 풍경을 개선해볼 길은 없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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